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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안녕 1부

소년은 그녀에게 머라고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터질듯한 불안감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자 체크무늬 교복의 그녀는 잠깐 놀라더니 이내 미소를 짓고선 버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니가 나중에 더 큰후에~
그녀가 몸을 숙이자 어깨 너머로 가렸던 봄햇살이 버꾸의 눈으로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버꾸는 집으로 오는 동안 자신은 그 시간을 기점으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은 초등학생인 자신의 조그마한 손을 바라다 보며 빨리 키가 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버꾸는 밥을 많이 먹기 시작했다. 꼬박 두그릇씩 먹었으며 하루에 네끼 또는 다섯끼까지 먹기도 하고 가난한 형편에 엄마를 졸라 학교에서 우유급식을 했으며 틈만 나면 먹을것을 찾아 먹었다. 덕분에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할때쯤엔 목이 없어지고 제법 근사한 언덕같은 배를 가진 돼지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은 몸이 되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버꾸는 그녀를 집앞에서 종종 보았고 자신이 어리기에 아직은 이르다고 현명하게 판단했다. 가끔씩 우연치 않게 마주치게 되면 그녀는 그를 기억하곤 항상 버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니가 나중에 더 큰후에~ 내이름?  약간 멋쩍은듯 망설이다가 이내 같이 웃어달라며 버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수남이란다. 수남! 남자이름 같지? 버꾸는 참으로 멋진 미소라고 생각했다. 그 미소는 봄 햇살 기운처럼 퍼져갔고 그는 그것을 마음속에 꼭 담아두려 작은 손을 꼭 쥐고선 가슴에 댔다.



버꾸가 중학교1학년 막바지에 그녀의 집이 그녀의 대학입학과 함께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녀가 이사하는 날 버꾸는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직은 이르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옆집누나? 응 오늘 이사갔단다. 짐은 이미 보냈고 방금 인사하고 차타러 나갔어. 그 누나가 버꾸 못보고 가서 아쉽다고 말하더라. 응? 뭐라는거야? 어디가 버꾸야 밥먹어야지! 버꾸야!
버꾸는 전속력으로 달렸으나 몸이 무거워 말을 듣지 않았다. 멀리서 횡단보도가 보이고 길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그녀가 보였다. 파란불이 점멸하고 있었다. 버스가 오고 그녀가 오르자 초조한 마음에 그는 속력을 내려 했으나 무거워진 몸은 느리기만 하였다. 터질듯한 불안감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버꾸가 횡단보도를 건너려하자 신호가 바뀌었다. 지날수 있는 거리라 생각했지만 빠르게 달리기엔 그는 예전에 비해 너무 무거웠다. 끼이익! 버꾸의 몸이 붕 떴다. 순간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꽤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녀를 찾았으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니가 나중에 더 큰후에~ 봄햇살이 따뜻하다. 쿵 off . 버꾸가 다음으로 정신이 깼을때는 이미 그녀는 떠난 후였고, 어머니가 하염없이 울던 낯선 병원 침실이 있었다.
그날 이후 버꾸는 발가락을 두개 잘랐고 교통사고때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휴유증으로 말을 더듬게 되었다.


그날 이후 버꾸는 더듬거리는 자신의 말투때문에 말수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버꾸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는 뜻이었다. 사실 버꾸는 원래부터가 혼자였다. 어머니는 공장에 다니시느라 늦게나 집에 왔다가 피곤에 지쳐서 잠이 들기 일쑤였고, 버꾸와 달리 활달한 성격의 형은 집에서 버꾸를 상대하기보단 하루종일 밖에서 뛰놀았으며, 오만가지 여러 종류의 책들을 팔러 다니시던 아버지는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불어닥쳤던 금광 찾기 붐에 끼면서 전국곳곳을 떠돌아다녀서 안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렸을때부터 혼자 있는다는 것에 적응해야했다. 아니 그것은 그가 태어날때부터 지녀야 했던 것이며 지녔던 거라 그는 외로움과도 같은 감정을 알지도 못했고 느끼지도 않았다. 태어날때부터 항상 배가 고팠고 배부름에 대한 기억이 없어 배부름에 대한 동경같은 것이 없는 아이처럼 버꾸는 외롭지 않았던 기억이 없어서 외롭다는 감정을 알지 못했다.
그 해 봄날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를 보기까지는 말이다. 눈부시다. 가슴이 아프다. 그 미소가 그를 외롭게 만들었다. 가슴에 담고 싶어 작은 손을 꼭 쥐어보던 그 순간

하루종일 집에 있는 버꾸가 하는 일은 두가지였다. 파산되어서 버리진 못하고 집안곳곳에 쌓아 놓은 수많은 책들을 맘내키는대로 꺼내서 읽거나 세평 남짓한 작은 방에 멍하니 누워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일이었다. 책들은 그가 읽기에는 대부분 어려운 책들이었으나 그다지 할일이 없었던 버꾸는 서양여자가 슬픈표정으로 한쪽 가슴을 드러내고 속살이 비치는 속옷을 입고있는 야한 책표지로 되어있던 책을 꺼내 읽었다.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내용들이 나와서 무작정 읽다가 한참을 읽었을때 이것이 편지형식의 글이라는 것을 알고 야한 장면이 없겠구나라고 생각되어 책을 덮었다. 제목을 보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오기가 나서 이번엔 정말 제대로된 야한 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다가 한권을 찾았다.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의 무릎에 키스하는 장면이 묘사되자 버꾸는 흥미롭게 계속 읽어갔다. 그런데 몇장 안넘겨서 갑자기 여자주인공이 죽으면서 허탈하게 내용이 끝나자 허무하기만 했다.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버꾸는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 아직 어린나이여서 이해 못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으나 이해할수 있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 내용은 어떤 이미지나 느낌이 되어서 그에게 다가왔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때는 적당히 건너 뛰면서 읽었다. 많은 독서량 덕분에 버꾸는 그나마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글을 빨리 읽는것이 되었다.


버꾸의 집은 항상 지저분했다. 365일 일하느라 바쁘신 어머니대신 일 할 사람이 없었다. 몇번은 버꾸가 집안청소를 하긴 했지만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너무나 작았고, 해봤자 표시도 나지 않자 버꾸는 그것마저도 그만두었다. 버꾸도 자라온 환경탓인지 더러운거에 대해서는 적응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집에서는 환기가 잘 되지 않아 습기찬 곰팡이내가 났으며, 곳곳에 거미줄과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엔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었고, 옷은 거의 빨지 않아 더러웠고, 화장실은 몇년은 되어보이는 때가 묻어 있었고, 식기들에는 딱딱하게 굳은 밥알과 정체모를 얼룩이 조금씩 있었다. 어쩔수 없는 일인지는 버꾸도 알았다. 하루종일 일하고 와서 두 아들까지 보살피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살림하는데 쓰는 시간을 줄여야 했기 때문에 빨래하는 횟수를 줄이고 설겆이 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시늉하듯 헹구기만 했고 청소는 가구일체는 손댈 틈이 없어 바닥을 닦는 정도로만 했다. 그것도 방바닥만.. 하지만 언젠가 밥속에서 철수세미 조각이 나오는 것은 좀 심하다고 버꾸는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어머니에게 지적해주었지만 다음날 밥속에서도 다시 은빛이 나는 철수세미 조각이 나왔고 이틀후 다시 조각이 나오자 버꾸는 참지 못하고 숟가락을 던졌다. 이 이런 것을 먹는다면 죽을수 수 도 있다고 저엉말이야. 그러자 어머니는 밥속에 조각을 손으로 집어내어 버리며 말했다. 자 이제 먹으렴
그날밤 버꾸는 밥을 먹지 않았다. 대신 방에 들어와 읽다만 죄와벌을 읽었다. 비극으로 끝날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끝까지 읽지 않고 책을 덮었다. 이어서 오헨리의 단편들을 읽었다. 특히 금고털이라는 제목의 단편은 참으로 멋졌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버꾸는 문을 열지 않았다. 두어번 문을 두드리다가 버꾸가 기척이 없자 문밖의 사내가 말했다. 빵하고 우유좀 사왔다 여기 놓을테니 먹고 자려무나.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