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ae
2011. 6. 20. 21:42
"수남이에요 수남! 남자이름 같죠?" 그녀는 10년이 넘는 세월속에 훌쩍 커버린 버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따뜻하다. 다행이다. 놓치지 않으려 오른손을 꼭 쥐어 가슴에 댄다. 그녀는 그의 이상한 행동에 약간 의아해하게 쳐다본다. 그런 그녀를 다시 버꾸가 바라본다. 보고싶었어. 그의 말없는 미소에 약간 의아해하던 그녀도 이내 다시 환하게 미소짓는다
어린 버꾸는 책을 읽는것마저 지겨워지면 잠을 잤다. 그래야 시간이 갔으니까. 시간이 가야 사람들이 왔으니까. 낮에 잠이 안와도 눈을 감고 계속 있으면 잠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잠에 취해 계속 잠을 자곤 했다. 그렇게 자다가 깨면 저녁이 되어 있었고, 비몽사몽간에 현실감 없이 영상과 소리가 흐리고 멀게만 느껴지다가 부엌에서 찌개냄새가 새어나오면 그 냄새가 코끝을 타고 들어와 흐리던 영상이 맑아지고, 버꾸야 빨리 와서 밥먹어야지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의 공간은 흑백에서 칼라로 바뀌었다. 이처럼 자고 일어나면 죽은듯 하던 집은 마법처럼 활기가 돌았다. 외롭지 않다. 그래서 그는 혼자가 힘들때면 잠을 자곤 했다. 그래야 시간이 갔으니까 하지만 낮에 너무 많이 자니 밤에 잠이 안오고 모두가 잠든 밤에 그는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어야 했다. 어두운 밤에 너무 오랫동안 잠이 안오고 무서울때면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아주 조금 울었다. 모두들 바빠서인지 아니면 버꾸를 믿어서인지 중3무렵부터 버꾸는 동네 친구인 욱이네집에서 자주 외박을 하곤 했고 그의 집에서도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버꾸는 욱이네 집에 놀러가는 것이 좋았다. 딱히 머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잠이 안올때 같이 잠이 안오는 친구가 있다는건 행운이었다. "가령 이런것이지 이런 의자는 누구거지? 라고 물으면 차가워라고 대답하는 것이지 그런거라고" 잠안오는 두 녀석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는 공부이야기도 텔레비젼의 드라마이야기도 집안이야기도 음악이야기도 아니었다. 존재에 대한 혹은 사유 이성에 관한 철학이야기였다. 물론 그런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전무하다시피 한 지식으로 그들은 무언가를 상대방에게 설명하려 애썼으며 역시나 얄팍한 지식으로 반박하고, 서로 뜻도 모르는 단어를 쓰면서 조금더 깊게 들어가려 사고를 집중하며 세상의 가치를 그 둘이서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정의내렸다. 누가보면 어리게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동시에 멋진 일이기도 했다. 중3 남학생 둘이 좁은 방에서 밤새 할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이 있겠는가? 세상의 가치를 정의내리던 그 순간만큼은 세상은 그 둘의 것이었고, 세상은 그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으며, 그 둘의 논리가 합의를 보는순간 그 논리는 신의 계시만큼이나 절대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이 작은 세상은 언젠가 커다란 세상과 만나게 될것이다.
"나 이틀 연속 그녀의 꿈을 꾸었어. 그녀를 만날거야. 이건 신의 계시라고" 버꾸는 진지해져 있었다. 그러자 욱이는 신의 존재는 고대의 인간들이 죽음과 고통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 일종의 위안으로 삼았던 상상에 불과하다는 그 둘의 합의된 논리를 일깨워주었다. 그러니까 신의계시라고 말하면 안돼. 알았어? 응 그래 그렇다면 난 이것을 흠 그래 기적이라고 부르겠어. 기적! 아 참 기적도 안될려나? 그러자 욱이는 말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괜찮아
그리고 삼일후 버꾸는 가출했다. 계획은 철저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돈도 적당히 모았고 그녀가 다니는 대학의 위치도 알아 놓았고 그의 키가 이제 170가까이 되었다. 분명 그녀보다 클것이다. 그녀를 만난 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만나면 모든 것이 잘될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우선 저녁밥을 든든히 먹은후 그는 욱이네 집에 간다고 나왔다. 서울행 기차를 탈까 하다가 이 밤중에 가봤자 어차피 못볼것이니까 새벽에 출발하기로 마음먹고 욱이네방에 갔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평소에 말상대 해주던 욱이가 잔다. 버꾸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가출한 하루가 지나갔다
그 다음날 잠을 거의 못잔채 출발한 버꾸는 기차칸에서 잠을 잤다. 그래서 기차가 도착한지도 모르고 계속 자고 있어서 누군가가 깨우고서야 도착한걸 알게 되었다. 처음보는 낯선 도시에서 잠이 깨어 내린 버꾸는 현실감 없이 영상과 소리가 희미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찌개냄새는 어디에도 없다. 버꾸를 부르는 목소리도, 항상 무언가를 먹으라고 말씀하시던 엄마의 목소리도 없다. 일종의 위압감이 버꾸를 짓눌렀다. 덜컥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버꾸는 한참을 멍하니 서서 망설인후에야 발걸음을 옮길수 있었다. 하늘은 층운형 먹구름에 을씨년스러웠고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가느다란 보슬비가 소리없이 공중에 떠 있었다. 우산을 챙길걸. 어떻게 찾을려고? 무슨과인지도 모르잖아? 몰라 그냥 학교정문앞에 있으면 만날수 있을거라 믿어. 하지만 중학생인 버꾸는 대학생은 토요일엔 쉰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버꾸는 당항했다. 어떻게 할지 몰랐다. 낯설게 큰 학교에서 낯선 연령대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알아들을수 없을만큼의 소리로 울린다. 낯선 도시의 낯선 풍경은 계속 버꾸에게 위압감을 주고 있었고 그것은 계속 커지는듯 했다. 빛이 있으라
버꾸는 기차를 타고 다시 내려오면서 그녈 못보고 아무 성과없이 돌아가는 자신이 슬프기도 했고, 위압감으로부터 벗어나 친밀한 곳으로 간다는 기쁨이 뒤섞인 묘한 감정에 싸였다. 괜찮아 잘될거야. 그리고 그날밤 욱이네 집에서 자면서 그렇게 가출 이틀째가 흘러갔다. 다음날 일요일이 되자 버꾸는 아무 생각없이 욱이의 방에 하루종일 꼼짝않고 누워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만 갈게. 욱이집에서 나온 버꾸는 특별히 할일이 없고 옷도 갈아입을겸 집에 들어갔다. 모두 모여서 수제비를 먹고 있었다. 버꾸를 보자 어머니가 대접을 가져와 수제비를 넘치게 하나 가득 부었다. 얼릉 먹어. 수제비에는 머리도 따지 않은 멸치 몇마리가 둥둥 떠다녔다. 버꾸는 아무말없이 앉아서 자꾸 떠지는 멸치를 치우며 수제비를 먹었다.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버꾸가 가출한지 모른다. 버꾸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하튼 나는 가출한적이 있었어라고 훗날 버꾸는 그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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