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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장마(소설) 수정

            

 

 

 

         제목 : 장마    조금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1

몰라 기억이 나지 않아. 그땐 너무 취했었거든.”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선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여름날에 마시는 미지근한 맥주가 나쁘지 않다. 비를 한껏 맞은 상태라서 더욱 그랬다. 우리는 이미 비를 맞고 홀딱 젖은 채로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등나무인 탓에 벤치도 젖어 있었지만 우리는 이미 젖을 대로 젖어있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젖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에 괜찮은 여름날 오후였다.

넌 그게 문제야

?"

아니 기억력

술은 더 없어?”

없어. 두 병만 샀어.”

아쉽네.”

정신 차려. 우리의 목적은 술이 아니야.”

그럼 뭔데?”

그녀가 술을 한 모금 깊게 마신다. 그리곤 꽤 진지하게 대답한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정복하는 것이지.”

정복이라~ 종희는 항상 그런 식이다. 올해 여름 우리는 정말 그랬다. 반드시 정복해야 할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얼마 전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늘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나서 하는 일은 별다른 게 없었다. 그냥 비를 맞고 걷는 것이었다. 걷는 동안 이야기도 별로 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비정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걷는 것이 전부였다. 어떨 때는 두 시간 동안 걷기도 했었고, 언제는 반나절을 걸은 적도 있었다. 단지 비 맞으면서 걷는 게 다였다. 걷고 또 걸었으며 걷다가 지치면 잠시 쉬었을 뿐 다른 것을 하지는 않았다. 쉬는 것이 끝나면 다시 걷는 일이 반복되었다. 걷다보면 강물이 흐르는 다리가 나오고, 또 그렇게 걷다 보면 좁은 골목들이 나오고, 구부러진 골목과 교가도로가 나오고, 걷다 보면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나오고, 다시 다리가 나왔다. 올해 여름 우리는 무엇이라도 씐 것처럼 비가 오면 우산도 없이 계속 걷는 일에 집중했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나 자신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여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걷는 것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반드시 충분한 양의 비가 와야만 했고, 두 번째는 걷는 곳은 항상 처음 걷는 곳이어야만 했다.

넌 이렇게 비 맞고 걷는 것이 어떤 점이 좋은 거지?”

한참 큰 도로 옆을 비 맞고 걷다가 난 그녀에게 물었다. 종희는 대답이 없다. 난 안다. 그래서 재촉하지 않고 걷는 일에 집중한다. 작은 골목길에 접어들 때쯤에서야 종희가 말하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 항상 걱정했지. 우산을 들고 나가야 하고, 우산을 어디에 잃어버리고 올까 항상 신경 써야 되고, 혹여 흙탕물이 튈까 하고 조심해야 했고, 조금의 비라도 안 맞으려고 정성스럽게 우산을 접고 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버려도 되는 입장으로 비를 맞고 있으니까 몸에 지니지 않는 만큼 마음의 무게도 줄어드는 것 같아. 그게 좋다면 좋은 것이겠지.”

그녀가 봤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력은 부족했지만 이해되는 설명이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차가운 빗방울이 피부를 때리고 지나가면서 나의 곳곳의 감각을 깨우는듯하다. 나는 갑자기 오랜만에 의미있는 말이 하고 싶어졌다.

빗소리는 작은 오케스트라이다.”

그녀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대꾸한다.

그건 빗소리가 아니라 피아노지. 베토벤이고.”

아 그래.”

그녀는 한마디를 더한다.

감기는 절대 걸리지 마라. 꼭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자.”

.”

우리는 계속 걸었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걸었다. 때론 그녀가 앞에 서고, 때론 내가 앞에 서기도 하고 가끔은 서로 옆에 서서 걸었다. 우산이 없어서 우리는 걷는 것이 더욱 편했다.

 

 

 

2

우리는 일탈적인 산책을 한동안 지속하였다. 비가 오면 전화가 오고 그러면 어딘가에서 빗속을 걷고, 다시 날이 맑아지고 며칠 후에 다시 비가 내리고 그러면 낯선 동네에서 빗속을 걷는 그런 날이 반복되었다. 올해는 비 오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어느 날 타버린 필라멘트로 깜깜해진 전구처럼 우리의 일탈은 끊겼다.

어느 날부터인가 비가와도 종희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 아마 일 때문에 바빠서 그러겠지 하면서 넘겼지만 계속 연락이 없자 내가 전화를 했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꺼져 있었다. 그냥 관둘까 하다가 몸이 찌뿌둥하면서 근질근질한 것이 며칠 지나자 참지 못하고 다른 동창들에게 수소문하여 종희가 근무하는 학교의 이름을 알아내고 전화를 했다.

방학 중이라 한 달 휴가를 내셨어요. 어디 여행을 간다고는 했는데요.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기를 끊고 멍하니 있다 보니 짜증이 났다. 그래도 어디 간다고 한마디 정도는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러고 있자니 더 짜증나는 것은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라는 것이다. 일기예보에서는 오늘부터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혼자라도 나갈까? 며칠 동안 통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서 몸이 근질근질 하고 기분이 우울하다. 아마 비를 맞으면서 걷다 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와 같이 걷는 것이 좋긴 한데…….

난 전화기를 들어 이곳저곳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도 내 처지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전화를 받는 사람들은 친절히 대해주었다. 그중에 20년 지기 친구인 중학교 동창인 창민이가 나와 운동을 같이 해주기로 했다. 나는 큰 방수 가방에 창민이의 지갑과 휴대전화기를 쑤셔 넣고 어깨에 멨다.

근데 정말 비 맞으면서 걷는 거냐?”

어 그런 셈이지.”

창민이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내 관둔다. 그의 미간은 지뿌려져 있고, 먼 산을 응시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나왔으니까 좀 먼 동네로 가보고자 한다. 다행히도 비는 꽤 많이 온다.

우리는 모르는 동네에 내려서 비를 맞고 걷기 시작했다. 비를 맞고 걷기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자 창민이도 조금은 익숙해진 듯하다. 그래서 나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앞으로 계획은 세우고 있는 거냐?”

우리는 한참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흠 그래야지.”

그래도 주위에서는 네가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기대하는 친구들도 많았었는데 이렇게 돼서 좀 그러네. 그렇게 쉽게 망할 사업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너도 충분히 열심히 했고, 준비도 많이 했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이젠 지나간 일이니까.”

그때 큰 트럭 한 대가 굉음을 울리면서 큰물을 튀기고 지나갔고 그 물이 우리의 온몸을 적셨다. 아직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창민이는 당황했다. 나는 창민이가 익숙해질 때까지 잠시 서서 기다려주었다. 물은 이미 우린 몸의 안과 밖에 가득하다, 창민이도 머릿속에서 이런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잠시 기다리니 계산이 다 끝난 듯 괜찮다는 신호를 내게 보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빚이 얼마라고 했지? 아니다 됐다. 그런 것 계산해봤자 머리만 아프지. 어차피 한두 푼도 아닐 텐데 말이야. 그래도 좋게 생각하자. 우린 아직 젊고 책임져야 할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떻게든 안되겠냐?”

오래된 친구는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안 좋은 것만도 아니다. 괜히 귀찮은 간섭과 따뜻한 위로의 중간쯤에서 줄다리기하며 창민이는 대화를 이어갔다. 대부분은 나에 대한 조언들이었다. 차라리 파산 신청하는 게 어떻겠냐? 자신이 하는 분야로 와서 일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것들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린 조금씩 숨이 가빠왔고 그 숨은 일정 이상 더 오르지는 않았다. 적당한 숨 가쁨과 입김이 나왔고, 세상은 어둡고 시원했다. 다행히 비는 중간에 끊이지 않고 계속 내렸다. 꽤 오래 걸었지만 큰 도로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쉬기로 하고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는 가방에서 맥주를 꺼내어 오랜 친구에게 하나 건넸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 킨 창민이는 미지근한 맥주가 꽤나 맛있다고 칭찬한다. 고마운 말이다.

예전에 우리 둘이서 덕유산을 한 번도 안 쉬고 두 시간 만에 올라간 거 기억하냐? 그때는 처음 가보는 곳이라 얼마 걸리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걸었잖아? 한 시간 코스 정도 인지 알고 계속 안 쉬고 올라가다가 너무 힘들어서 내려오는 사람들한테 물었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그때 사람들이 거의 다 왔다고만 말해주어서 우린 정말 그런 줄 알고 계속 쉬지 않고 올라갔었지. 그때 우리는 겨우 중간밖에 오르지 못했는데 말이야. 아 그때 정말 힘들었었는데.”

창민이 말에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생각나지?”

응 당연하지. 내 등산 중에 가장 힘들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도 생각나지?”

응 김밥 말이지?”

그래 김밥. 정말 힘들어서 정상에 도착하니 어떤 여자애들이 김밥을 먹고 있었는데 정말 먹고 싶었지. 아 그때는 김밥 한 줄에 만 원에 팔았어도 사서 먹었을 거야.”

나도 어찌나 먹고 싶던지 하마터면 그 여자들에게 거의 말을 걸 뻔 했어.”

아니 너 그때 말을 걸었었잖아?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나는 모르지만 말이야. 난 그때 갑자기 그 여자들에게 말을 걸어서 깜짝 놀랐어.”

내가 그랬었나? 이상하네. 기억이 없어.”

넌 기억력에 무슨 문제 있냐?”

난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생각나는 것은 그때 정말 그 김밥이 먹고 싶었다는 것뿐이었다.

 

 

 

3

창민이는 직장일이 바쁜 시기라 나와 시간을 잘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 나도 걷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창민이에게 계속 전화하기도 미안했다. 그래서 나는 전화하면 받아줄 사람들을 찾아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광석 선배였다. 내가 전화를 하자 선배는 기꺼이 나왔다.

그래 넌 술 좀 줄였냐?”

지금은 본의 아니게 그러네요.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아요. 가끔 맥주 한 병 정도 하는 것 말고요.”

그래 잘했다. 일단 몸부터 추슬러야지. 워낙에 네가 술을 많이 마셔서 좀 걱정되었는데 말이야. 학교 다닐 때부터 너를 생각하면 거의 취한 모습부터 생각났을 정도야.”

선배는 양복을 입고 나왔다. 나는 양복이 젖으면 좀 그렇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선배는 단념한 듯 괜찮다고 말했다. 비는 오는 양이 일정하지 않았다. 조금씩 내렸다가 갑자기 누가 물을 퍼붓듯이 오기도 했다가 다시 이내 조금씩 내리기를 반복했다. 걷기에는 그리 적당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일단은 걷기 시작했다. 마른 옷과 몸이 비에 젖는 것이 느껴진다. 물기로 인해 옷이 살에 조금씩 달라붙는다. 왠지 불안하면서도 통쾌한 기분이 든다. 이내 곧 굵은 빗줄기가 한바탕 쏟아지고 지나가자 온몸이 물로 완전히 젖었다.

그 녀석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더라. 참 그 녀석이 그렇게 할 줄은 나도 몰랐다. 나도 녀석을 꽤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람이 돈 앞에서는 달라지나 봐.”

연락이 한 번도 안 왔었나요?”

아직.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 그깟 돈이 뭐라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지. 녀석이 그렇게 도망만 가지 않았어도 이렇게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 점에서는 소개해준 내 잘못도 있는 것 같아서 항상 너에게 미안하다.”

지나간 일이고 형도 몰랐잖아요. 됐어요.”

갑자기 다시 큰소리를 내며 빗줄기가 굵어진다. 선배가 무슨 말을 하는데 도통 들리지 않는다. 내가 잘 안 들린다는 신호를 하자 선배는 더 큰 목소리로 말하지만 역시나 안 들린다. 그래도 나는 듣는척한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비가 약해진다. 그리고 선배 목소리가 들린다.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어차피 어떤 질문이었어도 나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였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장치라는 것은 우리 몸에 없으며, 하물며 남을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는 마음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충분하다고.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4

언젠가 나는 리셋(reset)하는 것에 집착했다. 오래된 오디오기에 달린 테이프가 돌아가면서 남긴 숫자를 버튼을 눌러서 숫자가 0000을 가리키게 하는 것이 좋았다. 무언가 산뜻하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자동차에서도 킬로수를 알려주는 숫자판에 달린 버튼을 눌러서 리셋하는 것도 좋아했다. 리셋할때는 되도록 높은 숫자를 0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았기에 참았다가 누르곤 했다.

언젠가 체육사를 운영했었던 이모부가 준 스톱워치가 있었다. 내가 이제 막 중학교를 입학했을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것을 몹시 갖고 싶어했고, 친절한 이모부가 내 생일선물이라며 주셨었다. 20년 전 이야기이다. 이제는 오래되어서 낡았고, 세련된 디자인에 비해 너무 크고 뭉뚝한 스톱워치였다. 그 스톱워치로 내가 하는 것은 아무 시간이나 재는 것이었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시간, 밥 먹는 시간, 라면이 익는 시간, 영화를 보는 시간, 잠자는 시간 등등 언제부터인가 틈만 나면 시간을 쟀다. 그리고 그 남겨진 시간을 리셋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버튼을 누르면 스톱워치의 여섯 자리 숫자가 0으로 리셋이 되었다. 기억하기 위한 기록을 위해 시간을 재고 다시 리셋을 통해서 더는 기억해야 할 무언가를 사라지게 했다. 그렇게 리셋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집착이 점점 심해질 때쯤에는 은행에 있는 대기표를 보고선 리셋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불행히도 그것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비를 맞고 걷기 시작한 날부터 나의 그런 마음은 조금씩 사라졌다. 그리고 낡고 오래된 스톱워치는 원래 자기 위치인 서랍 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어느 날 열어본 서랍 속에는 스톱워치가 없었다. 내 시야에서도 내 기억에서도 없어져 버렸다. 스톱워치가 스스로 리셋이 되어 버렸다.

 

 

 

5

오늘은 강한 바람과 함께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비는 일정하게 내리기보단 자꾸 누군가가 세숫대야로 물을 길어 퍼붓는듯했다. 낮인데도 날은 어둡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걷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다른 할 일이 없는 관계로 나오기 싫어하는 후배를 억지로 데리고 나왔다. 덕분에 녀석은 계속 투덜대는 중이었다.

휴 도대체 이런 날씨에 비 맞고 걷고 있다니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거 참. 형 그러지 말고 인제 그만 어디 들어가서 소주나 한잔 합시다. 힘들어 죽겠네.”

당분간은 술 끊었어.”

형이요?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루도 빠짐없이 술 드시던 양반이 왜 이러실까? 그러지 말고요. 비를 계속 맞았더니 추워요. 어디 가까운 데로 들어가서 몸 좀 녹이면서 한잔하게요.”

정말이야.”

허 놀랠 노자네. 형이 술을 다 끊었다고 말하게. 술 먹고 광석 선배랑 싸우던 데가 얼마 전이었는데.”

내가 광석 선배랑 싸웠다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기억 안 나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형이 술 먹다가 광석 선배한테 화내기 시작했고, 주위에서 말렸는데 들은 체도 안 하고 치고받고 싸웠잖아요. 어떻게 그게 생각이 안나요?”

기억이 안 나. 너무 취했었나 봐.”

나는 정말 기억이 안 났다. 후배는 이내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따라왔다. 학창시절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나이를 먹어도 녀석은 말이 많다. 투덜대는 것도 많고.

근데, 종희 선배랑은 연락해요?”

간혹 연락해. 잘 있어.”

그 사람이랑 결혼한다던데 언제래요? 저번에 언제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네? 이제 얼마 안남았을텐데. 뭐 어차피 청첩장 나오면 알게 되겠지요.”

생각해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내 앞가림만 하느라 바빠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락은 없지만 뭐 어차피 잘 지내는듯하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녀석을 보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때 비가 거세지면서 머리를 때린다. 도무지 비인지 누가 하늘에서 물을 퍼붓는 것인지 앞이 잘 안 보인다.

이렇게 비에 완전히 젖어서 걷다 보면 오줌을 싸도 아무도 모르겠네. 크크

그러더니 녀석은 오줌 싸는 흉내를 내고 나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장난인지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바람이 세다. 빗방울이 조금 아프다. 강한 비바람에 눈이 잘 안 떠지고 머리카락은 모두 뽑혔는지 느낌이 없다. 조급한 마음에 고개를 숙인 채 발걸음이 빨라진다. 후배는 여전히 투덜댄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이제는 그만 해야 할까?

 

 

 

6

창민이의 소개로 면접을 보고 나오던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왔다. 양복을 입었는데 어쩌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미 난 걷고 있다. 여기서 집까지는 어느 정도 거리지? 가는 길을 헤아려 본다. 갑자기 내린 비라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그것도 잠시일 뿐 거리에 그 많던 사람들이 몇 명 안 남기고 없어진다. 다들 어디 가게라도 들어갔나 보다. 사실 며칠 동안 무더위였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을 준비한다는 것이 더욱 이상할 것이다. 이렇게 비 맞으며 텅 빈 거리를 걷고 있자니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든다. 좀 걷다 보니 미지근한 맥주가 마시고 싶다. 맥주가 없으니 대신 담배를 입에 문다. 이 정도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 가능할 듯싶다. 담배를 두 대 피고 나니 비는 더욱 거세졌다. 이젠 더는 담배를 피기에는 힘들다. 맥주를 마실까 하다가 관둔다. 아무래도 술은 끊는 게 좋을 듯싶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앞에 걸어가는 소년과 부딪칠 뻔 했다. 내 절반 정도의 키에 얇은 흰색 반팔티를 입고 있는 모습이 추워보였다. 소년은 우산 없이 이미 젖을 대로 젖은 상태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나와 같다. 나도 왠지 소년을 앞질러 가는 것은 규칙에 어긋나는 듯 한 마음이 들어서 소년의 속도대로 뒤에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렇게 걷다 보니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소년 옆에서 걷고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난 소년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내 관둔다. 대신 속으로 생각을 한다.

넌 왜 이렇게 비 맞으면서 걷고 있는 거지?”

내 마음속 소년은 대답한다.

길을 잃었어요. 아저씨는요?”

나도 그렇단다.”

낮이라 꺼진 간판이 많아서 저녁보다 어둡다. 이 도시에 소년과 나만 남은 것 같다.

어른이라면 길 같은 것은 잃지 말아야죠. 우유를 마셔요.“

“.......”

바람이 세진다. 눈이 찌푸려진다. 덕분에 더 어두워진 느낌이다.

근데 어디를 가는 중이었는데요?”

뜨끔하다.

그러게 그걸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는지…….”

잠시 둘 사이에 생각의 침묵이 흘렀다. 내가 이어서 말을 했다.

분명 어디를 가고 있었겠지. 근데 그게 어디인지 기억이 안 나. 또한, 어떻게 하다가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겠어. 길을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낯선 곳에서 내가 길을 잃고 걷고 있는 거야. 무서운 일이지.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아직 소년이 옆에 있는지 바라본다. 다시 말을 이어간다.

내가 길을 잃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면 어떡하느냐는 것이야.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것 조차 생각이 안 난다면 그건 정말 두렵지. 그 두려움이 나를 항상 괴롭혀왔어.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길을 잃은 것인지 과연 난 기억할 수 있을까? 넌 어려서 아직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난 지금 그런 두려움과 싸우고 있어. 나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골짜기로 떨어지는 벼랑끝인지 분간이 안되는 어둠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힌트야.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야.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어. 조그마한 힌트.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실마리. 그래 그런 힌트. 제기랄!"

빗방울들이 내 얼굴을 때리며 지나간다.

울어요?”

아니 아직은.”

복잡한 세상이에요.”

그래.”

우리는 그렇게 마음속 대화를 하며 한참을 같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소년이 방향을 바꾸어 골목으로 들어간다. 난 잠시 멈추고 바라본다.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어두운 골목에서 소년은 점점 멀어지고 형태만 보인다. 소년이 한 번 힐끗 쳐다보고 가던 길로 간다. 그리고 내마음속 소년은 한 번 더 말한다.

비 맞고 걷는 것은 어른스럽지 않아요. 우유를 마셔요.”

그래.”

비는 여전히 계속 내린다. 난 이내 걷는 것을 관두고 택시를 잡는다. 다행히 택시 안 어른이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날 밤 난 잠이 오지 않는다. 감기가 걸리려는지 몸이 으스스하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가서 우유를 사온다. 따뜻하게 데운 후, 후후 불어가며 우유를 마신다. 따뜻한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간다. 신기하게도 난 이내 곧 잠이 든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독한 감기에 걸려서 얼마 동안을 누워있었다. 열이 많이 올라 술에 취한 듯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누워있는 동안 창밖을 보니 간간이 비가 온다. 나가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창민이가 몇 번 왔다갔다. 며칠이 지났을까? 장마는 끝났을까?

 

 

 

7

오랜만에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하나는 2차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종희였다.

걷기에는 비가 너무 조금 내리는데?”

뭐야.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그래. 그냥 잔말 말고 나와.”

나는 그동안 섭섭한 마음 반가운 마음 반반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마침 빨래를 한 후라 새 옷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낮인데도 날은 매우 어두웠으며 비는 간헐적으로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어? 학교에 물어보니 휴가를 냈다고 하던데?”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어.”

그것뿐이야?”

응 또 뭐가 필요한데?”

멋지네. 혼자서 배낭여행도 가고.”

원래 같이 갈 사람이 있었는데 취소되어서 혼자 갔어. 예약한 것도 아깝고 해서 말이야.”

나는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몸이 완전히 젖지 않을 정도로 비는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찼다. 왜냐하면, 오늘은 유난히 종희의 걸음이 빨랐기 때문이다. 이 정도 걸었으면 곧 쉴 것이기에 참고 계속 걸었다. 하지만 종희는 그날따라 걸음을 멈추지도 속도를 늦추지도 않았다. 난 매우 힘들었다. 곧 쉬겠지. 곧 쉬겠지 하면서 얼마나 더 걸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종희는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쉬기에 안성맞춤인 곳을 몇 군데 그냥 지나쳐갔다. 문득 지나다가 슈퍼 안 시계를 보니 우리가 걸은 지 두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비의 양이 적다보니 더 더웠다. 몸에 생긴 땀은 습한 기운에 마르지 않고 몸을 따라 흘러내렸다. 너무 덥고 힘들어서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서야 종희는 이름 모를 아파트 옆 길 벤치에 앉았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휴~ 하고 한숨이 먼저 나왔다.

비는 거의 그쳤고 구름은 걷히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이나 새벽 같은 햇빛이 있었고 비는 먼지같이 부서져 조금씩 흩날렸다. 다행히 벤치는 버드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고 충분하지는 않으나 조금씩 부는 바람이 이마의 땀을 말리며 식혀주었다. 맥주를 달라고 하려다가 관둔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린다. 피로 때문인지 이런 기분 탓인지 우리는 한마디도 안 하고 꽤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종희가 말을 꺼낸다.

별일 아니니까 그냥 들어.”

그녀는 정면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말문을 열었다.

너도 알게 되겠지만 그 사람이랑 헤어진 거 그 사람이 바람 펴서 그런 거 아니야. 주위에서 물어보니까 적당히 둘러댈 만한 것이 없었을 뿐이야. 아직은 솔직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어.”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본다. 구름이 더 생길지 걷힐지 모르겠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고 싶었어.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지만, 그냥 그런 배고픔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선택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어. 혹여나, 나중에 아주 먼 나중에 거울을 봤을 때, 너무 당연한 듯 그어진 주름속에 갇혀 나오지 못한 한숨이 있을까봐 걱정돼. 자부하며 살아온 내 삶이 나를 옭아매는 겉치레가 되어버리는 것이지. 그런 상태라면 나 자신에게 무척이나 실망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강해. 그렇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결정했던 거였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말은 줍지 못하고 고개만 계속 끄덕인다. 그녀의 말은 항상 설득력은 부족했지만 이해는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습한 공기 속에서 땀과 함께 침묵 속에 숨소리를 내었다.

너에게 새로운 길은 뭔데?”

그녀는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시선을 따라가니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예전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날 밤 자신을 찾아온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때 모습이 꼴이 말이 아니었어. 절박해 보였지.”

그게 누군데?”

예전에 만났던 사람.”

그러면 절박해 보이는 예전 남자친구 때문에 결혼하려고 했던 현재 남자친구와 헤어진 거라고?”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고 그랬어. 단지 그 말 뿐이었지. 시간이 없다고............”

그녀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 멈춘다. 설득력은 부족했다.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이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삶은 단순해야 한다. 아니 그러기를 바란다.

그때부터였어. 이렇게 걷게 된 것이. 나보다 더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네 앞에서 이렇게 사춘기 같은 얘기하는 게 웃기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고 생각해.”

사춘기는 좋은 거지.”

그렇다면 다행이고.”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짧지만 굵게 한 번 지나간다. 나는 갑자기 맥주가 먹고 싶어져서 그녀에게 묻는다.

맥주 좀 줄래?”

오늘은 안 사왔어.”

?”

이봐 이젠 너도 술을 줄이는 게 아니라 끊는 것에 집중할 때가 된 거야. 넌 내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지금까지 잘 해오고 있잖아? 좀 더 집중하라고.”

나는 의기소침해졌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난 네가 부럽다. 너의 정직함이.”

그러자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선 대답했다.

한 가지를 얻으면 한 가지를 잃는다는 것을 마음에 염두해 두고 살면 충분히 너는 정직한 거야.”

멋진 말이군.”

네가 해준 이야기야 옛날에.”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30년 넘게 살아온 내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뭐가 있을까? 또는 그것을 양으로 표현한다면 나의 기억의 양은 어느 정도일까? 확실한 것은 30년이란 시간에 비해서 그 양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해답을 찾으려 바동거려 보지만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나는 아직 비가 오면 걷는다. 걸으면서 바란다. 삶이 좀 더 단순하길.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다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가쁜 숨은 멎었고, 땀은 말랐으며 힘든 근육은 이제 준비가 되었다. 이제 다시 걸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는 뭐를 잃고 뭐를 얻었어?”

그녀는 내 말이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무언가 다르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다시 스톱워치의 시간이 갔다. 낡고 오래된 스톱워치. 그것은 디자인에 비해서 너무 크고 뭉뚝한 스톱워치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내 머릿속에서 멀어져 있었던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 떠오르는듯하다. 형체가 없어 무엇인지 감은 멀기만 하다. 쉽사리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갑자기 지워져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날 것 같은 기억이다. 어떡하지? 서두르지 말자. 조급하게 서둘러 기억 속게 가두어 놓으려 하지 말자. 아니다. 지금의 이 작은 기억의 끈을 꽉 잡지 않으면 다시 이 기억은 아무것도 없는 암흑 속으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 이런 두 생각에 난 그 희미함을 쉽사리 가져오지도 놓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때 나를 담당했던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고맙다는 말은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니에요."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그 기억은 아주 멀리서 떨어질듯 말듯 놓여있다. 앞서 가던 그녀가 뒤돌아 보고선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그녀를 보자 마음이 조금 놓인다. 그래 일단은 서두르지 말자. 조급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비는 계속 올 것이다. 나는 길을 잃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손짓한다.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버드나무 잎에 맺힌 빗방울 사이로 햇살이 선명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생각한다. 이제 곧 장마가 끝나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