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초능력 소년
1
나는 약속시각이 좀 촉박한 관계로 조급한 마음에 빠르게 걷다가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와 부딪치고 말았다. 이제 겨우 12살 남짓한 남자아이는 키가 크지 않아서 내 허리가 소년의 오른쪽 가슴을 쳤고, 아이는 비디오를 빨린 돌린 것처럼 360도를 돌더니 차가운 재래시장의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고, 넘어진 후에도 한 바퀴 더 굴렀다. 나는 깜짝 놀라 소년에게 달려가 일단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 살폈다. 애야 괜찮니? 어디 안 다쳤어? 아프지 않아? 조심하지 않고? 피는 안 나? 계속 질문을 하는데 아이는 말이 없다. 내가 너무 많은 질문을 한꺼번에 해서인가? 다시 묻는다. 어디 안 아파? 응? 어디 안 아파? 하지만 여전히 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 더러워진 자기 손바닥만 바라보며 말이 없다. 손에는 바닥에 끄시면서 긁힌 자국이 조금 있었지만,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의 왼쪽 광대가 긁힌 것은 약간 심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의 피가 보였다. 흘러내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흰색 분필로 그은 선처럼 생긴 상처에서 약간 붉은색의 피가 보인 것이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혹여 자신 때문에 얼굴에 상처가 난 것이 흉이 질지 몰라서였다. 주위를 둘러봤다. 소년의 보호자나 동행자가 있는지 찾아봤지만, 그냥 사람들이 오고 갈 뿐 넘어진 소년에게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옷차림도 이렇게 추운 날에 외투 없이 얇은 티셔츠 한 장 입은 것이 집이 근처인 동네 아이 같아 보인다. 3월 말인데도 공기는 너무 차고 먹구름에 바람은 세찼다. 이 정도 추위면 눈이 와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미친 날씨이다. 오늘 아침 일기예보에서는 이상 기온이라고 했고, 뉴스에서는 환경오염에 의한 현상이라며 떠들어댔던 게 생각났다. 여하튼 곧 4월이 되는데 한겨울처럼 이렇게 춥다니. 다시 소년을 보니 소년은 여전히 말이 없고 울지도 않고 있다. 소년은 내성적인 아이 같아 보이면서도 검게 그은 얼굴이 제법 고집스럽게도 보인다. 아이는 지금은 모르겠으나 놀란 감정이 끝나면 얼굴의 상처가 곧 더 아플 것이다.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그러자니 부모 동의도 없이 맘대로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한다는 것도 그렇고, 병원에 데리고 갈 정도로 다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급한데 어쩌지? 일어나서 앉아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망설이다가 이내 곧 결정을 내린다.
"자 일어나자. 아줌마하고 약국 가서 간단하게 약을 좀 바르자꾸나."
나는 소년에게 무의식중에 손을 내민다. 아차! 싶었다. 아이는 아마 안 잡겠지? 내성적이다가 고집 있어 보이는 것이 아마 자기가 그냥 일어날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네. 하지만 소년은 처음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손을 잡았다. 힘을 주자 소년은 일어났다. 그리고선 손을 탁탁 털었다.
"근데 너 여기사니? 여기에 가까운 약국이 어디 있는지 아니?"
소년은 다시 시선을 멀리한다. 그리고 여전히 말이 없다.
2
며칠 전 두 번째 상담이 있던 날 나와 남편은 의사와 마주하고 있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인데 첫 번째 시간에 하셨던 건강검진에서는 부인의 간 수치가 조금 높은 것 말고는 큰 이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건강하다고 보시면 안 됩니다. 저희가 하는 검진은 꼭 필요한 부분만 하므로 정확한 진단을 하고 싶으시면 꼭 종합검진을 하시길 바랍니다.”
의사는 멋스럽게 샌 흰머리와 얼굴의 주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나이였다. 5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나이는 많지만 작지 않은 키에 굵은 골격을 지녔다. 만약 신뢰감을 주는 어깨가 있다면 이 의사의 다부진 어깨가 그랬다. 표정의 변화는 크게 없었으나 목소리는 높지 않고 굵은 목소리로 마치 아나운서처럼 한 마디 한 마디를 차분하고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아니 이 정도의 외모와 목소리는 상대방을 끄덕이게 하는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중요한 사항을 브리핑하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자연선택으로 몸속으로 스며든 습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사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둥굴레차를 한 잔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메모링의 전반적인 교육을 하는 날입니다. 세 번째 시간에는 간호사가 좀 더 세세한 부분까지 해주겠지만, 의사가 먼저 교육을 하도록 하는 것이 규정입니다.”
“안내서를 읽어서 알고 있습니다.”
남편이 대답했다. 남편은 나완 달리 긴장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먼저 메모링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이젠 성형수술처럼 어느 정도 보편화 되어 있으니까요. 짧게 말씀드리면 메모링이란 한 사람의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여 심는 기술 또는 과정을 말합니다. 불과 10년 전 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현대에서는 뇌의 신호구조가 어느 정도 밝혀지면서 기억의 전달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 인간은 뇌에 대해서 완벽하게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 훨씬 더 많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멉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낸 것으로 메모링이란 상당한 기술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많은 기억상실자나 치매노인들에게 탁월한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이렇게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싶은 젊은 분들에게도 쓰입니다.”
나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 사람의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 난 별로 내키지 않았었다. 이런 문제로 병원을 찾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난 믿고 있다. 우리 부부는 이혼이라는 위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처음 남편에게 메모링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을 때 남편은 반대했다. 우리가 잘하면 그런 도움 받지 않고도 충분히 이 난관을 이겨낼 수 있다고 나를 설득시키려 했다. 하지만 한 번 소원해진 부부관계는 좀처럼 회복되기 어려웠다. 남편을 설득시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나의 강력한 주장에 남편은 한 걸음 양보해주었다. 하지만 나 자체도 그렇게 자신 있지는 않았다. 남편 또한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서로의 기억을 공유한다면 우리는 서로 더 잘 이해하게 될까?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남편이 간혹 짓는 정체 모를 표정에 대해서 알게 될까? 남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의 들키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어떻게 될까? 내가 전달하기 싫은 기억은 안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메모링의 첫 단계는 심고자 하는 기억이, 기억을 주려는 공급자의 뇌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아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다부진 어깨의 의사가 말한다. 문득 남편의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의사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지 별로 미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3
"아줌마! 자리를 창가로 옮겨요"
소년이 나에게 처음 한 말이었다. 상담 때 의사가 했던 말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멍해져 있었다. 약국에서 간단히 소독하고 치료했지만, 소년의 얼굴 상처가 마음에 걸려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뭐라도 좀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맥도날드에 들어와서 주문하고 앉은 다음이었다. 소년의 옮기라는 말을 듣고 무의식중에 옆자리로 옮겼다. 왜? 라는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옮기고 나니 궁금했지만 나는 그냥 묻지 않았다.
"그런데 네 이름은 뭐니?"
소년은 천천히 햄버거를 입에 물고 먹고 있었다. 너무 급하지 않게 그렇다고 맛없어 보이는 것만큼도 아닌 왠지 아껴먹는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먹고 있었다. 소년은 한 입 꿀꺽 삼키고서는 대답했다.
“버꾸에요 버꾸.”
“그런 별명은 누가 지어준 거지?”
“엄마가요.”
소년은 다시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먹으면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다. 바깥 거리도 추웠지만 가게 안도 추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냥 조금 춥다거나 추운 느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떨릴 정도로 매우 추웠다. 하얀 입김까지 나왔다. 히터를 안 틀었나? 추운 날에 장사하는 가게가 이렇게 춥게 관리해도 되나? 가서 직원 아무에게나 따질까 했지만, 곧 일어설 거로 생각하고 관둔다. 나는 소년을 천천히 살펴본다. 키는 130 정도? 색이 바래서, 몇 년은 입은 것처럼 보이는 발목이 짧은 청바지와 때와 흙이 골고루 묻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외투도 없이 얇은 티셔츠 한 장이라니. 얼굴은 갈색 흙빛처럼 어두웠고 머리카락은 푸석해 보였다. 분위기는 부유하게 자라지 못한 아이처럼 보였지만 눈만은 달랐다. 특이한 눈이었다. 옆으로 찢어진 듯 큰 눈에 검은자가 많아서 깊게 보이고 촉촉이 젖어 있는 듯 불빛이 반사되어 맑아 보이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몸은 바싹 말랐고 입은 아귀가 안 맞는 듯 튀어나와 어리숙하게 보일 뻔한 것이 매력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반전시켰다. 잠깐 마주쳤던 사람들도 ‘아! 그 눈이 예쁜 아이?’라고 기억할 만큼 특이한 눈을 가진 아이였다. 나는 앞의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입에 넣는다. 감자튀김은 금방 질리지만 처음 먹을 때의 짭짤한 맛은 좋다.
그때였다. 한 아가씨가 발을 헛디디며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놓쳐버렸고 '와장창'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그 쟁반 위에 있던 음식들이 쏟아졌는데 하필 콜라를 담은 컵이 내 옆자리로 떨어졌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피했지만, 다행히도 음료수는 옆자리로만 쏟아졌다. 아가씨는 연신 죄송하다며 냅킨으로 닦는다. 냅킨이 모자라자 더 가져오려고 계산대로 간다. 나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낭패를 봤겠다고 생각했다. 가만 여기서 자리를 옮기라고 했었지? 소년을 쳐다본다. 아니 버꾸를 본다. 버꾸는 관심 없는 듯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햄버거를 조심스럽게 씹고 있다. 소년은 알고 있었을까? 왜 알고 있었다는 듯 무관심하게 있는 거지? 잠시 생각해본다. 설마 그러진 않겠지? 나는 그 아가씨의 미안하단 소리를 몇 번 더 듣고서는 자리에 앉는다. 나는 소년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소년의 콜라를 한 모금 마신다. 이제 정오를 약간 지났는데 바깥 날씨는 여전히 흐리다. 특유의 추운 겨울날의 어떤 날처럼 말이다. 오늘은 병원에 세 번째 상담을 받으러 가는 날이다. 하지만 가기 싫은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근데 너 집은 어디니? 이 근처에 살아? 아줌마가 집까지 바래다줄까? "
여전히 소년은 말이 없다. 햄버거도 다 먹고 이젠 감자튀김을 하나씩 먹는 중이다. 나는 몇 번 더 묻다가 포기하고 만다. 소년이 햄버거를 다 먹고 나면 나도 내 갈 길을 가기로 한다. 약속시각이 촉박하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
"아줌마! 저랑 놀이공원에 안 갈래요? "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곤란했다.
"그보다 너 옷이 너무 얇게 입고 다닌다. 춥지 않아? 엄마가 걱정하겠다."
"엄마 없어요."
불쑥 튀어나온 아이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바로 쑥 들어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아이들은 이러던가? 어른들은 한 가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 나도 기죽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해야지.
"아빠는 계실 거 아니냐?"
버꾸는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먹고서는 씹으면서 말한다.
"아빠는 맨날 술 마시고 날 때려요. 욕만 하고요. 아까도 집에서 술 안 사왔다고 아빠한테 맞고 도망 나온 거에요."
맙소사! 일이 더 커져 버린 듯 했다. 더 이야기하자니 더 큰 폭탄이 터질까 두려워 더는 물어보지 못하겠다. 나는 순간 어떤 이야기를 할지 난감했다. 이렇게 큰 이야기를 듣고 모른 체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계속 캐묻자니 자신이 감당 못할 더 큰 이야기가 나올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비겁한 어른 같으니라고! 그렇게 안절부절 좀 조급해하고 있을 때 버꾸가 다시 물었다.
"아줌마! 저랑 놀이공원에 안 갈래요? "
다행히 주제가 다시 놀이공원이 되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 난 오늘 병원상담이 예약되어 있거든. 지금도 좀 늦은 것 같아. 너 다 먹고 나면 일어나야 할 것 같다."
안돼요! 갑작스러운 소년의 반응에 난 좀 당황스러웠다. 안되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선 다시 소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서 자신의 손바닥을 본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것일까? 왠지 소년의 행동 하나하나가 불안해 보인다. 아무 말 없이 있을 때는 어린아이가 지쳐 보이기도 한다. 아니면 외로운 걸까? 안쓰럽다. 순간 나도 약간 마음이 흔들린다. 병원이야 다음에 다시 예약해서 가면 되는데 이 소년과 같이 못 갈 이유도 없지 않을까? 그래도 나로서는 부담스럽기는 하다. 방금 처음 본 아이인데 놀이공원에 데려가다니.
"그럼 저하고 게임을 해요. 게임에서 이긴 사람 맘대로 하기로 해요. 네?"
소년은 아이같이 설레는 목소리로 나에게 동의를 구한다. 나도 약간 애매하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라 흥미가 생긴다.
어떤 게임? 나는 몸을 앞으로 당겨서 소년을 바라본다. 어떤 게임을 할 건데? 내가 묻자 소년은 잠시 생각한다. 소년의 눈이 빛난다. 난 소년을 눈을 흥미있게 바라보며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 아이의 깊은 눈이 매력적이다.
"이건 어때요? 아줌마가 나에게 질문을 하는 거에요. 내가 알기 몹시 어려운 것으로요. 이건 나 같은 아이는 절대 모를만한 것으로요. 정말 정말 어려운 것. 내가 그걸 맞추면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에요"
아이들은 본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앞뒤 안보고 덤벼드는 기질이 있다. 난 재미삼아 소년을 놀려주려고 장난을 좀 쳐보기로 한다.
"글쎄다. 그게 게임이 될지 모르겠네. 그냥 아무거나 내도 내가 이길 것 같은데? 가령 저기 주문하려고 서 있는 아가씨의 이름을 물어본다면 넌 모를 거 아냐? 네가 모를만한 것은 너무 많아서 너한테 불리할 것 같은데?"
순간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버꾸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어나서 그 아가씨에게 다가가더니 주문하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을 잽싸게 채가더니 가게 밖으로 뛰어 나간 것이다. 맙소사!
4
우리가 메모링을 신청하게 된 것은 이혼 위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남편과 나는 완벽하다 생각했었다.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나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모든 사람의 축복 속에 29살에 결혼했다. 나는 내가 다니는 출판사 일에도 만족하고 있었고, 출판사도 그 계통에선 좀 이름이 난 곳이었고, 난 꽤 오랫동안 일해서 봉급도 꽤 됐다. 나보다 여섯 살 많은 남편은 어려운 환경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 전자통신분야의 큰 회사에서 좋은 조건에 일하고 있었고 진급도 빨랐다. 나완 달리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한 타입이었다. 남편과 나는 모아둔 돈도 꽤 되어서 집안의 도움을 조금 받아 좋은 위치에서 30평대 아파트를 사서 신혼을 시작했을 때는 다른 친구들의 시기 어린 질투의 시선도 받았었다. 남편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모든 분야에서 세련되게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통솔력도 있었고, 어떤 장소에서든지 재치 있는 유머를 할 줄 알았으며, 필요할 때는 자신이 나서서 계획하고 지시하고 일 처리가 잘되도록 중간 역할도 잘 소화했으며, 혹여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어서 참여 못하는 사람까지 배려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과 다른 사람들을 웃길 줄도 아는 그런 세련된 남자였다. 못하는 것이 없어 보였다. 술이든 운동이든 노래든 남들보다 조금씩 더 잘했고, 다방면에 지식도 풍부했다. 한 번도 늦잠 자는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지나치리만큼 부지런했고 성실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언젠가는 늦게까지 계속된 회식으로 거의 날을 새고, 다음날 상갓집에서 또다시 날을 샌 다음 날 일요일에도 내 친정집 식구들과 가기로 한 전주 한옥마을까지 직접 운전하며 매끄러운 여행이 되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다. 저녁 늦게서야 집에 도착했지만, 남편은 불평 없이 나를 위해 커피 한잔을 타다 주었다. 그런 그를 보고 난 돌쇠라고 별명을 지어주었다. 남편은 그 별명을 좋아하는 듯 했다. 남편은 머리를 뒤로 모두 쓸어올린 후 숨을 힘껏 들이마셔 상체를 크게 부풀린 다음 양발을 벌리고 양팔의 이두박근에 힘을 주어 영화에서 봤을듯한 돌쇠 모습을 취했다. 난 까르르 웃었다.
“마님! 장작은 다 팼구먼요.”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내가 결정하기 어렵거나 못하는 일이라면 항상 그가 해결해줄 것이다. 라는 그런 믿음과 사랑이 내겐 있었다. 남편의 친구들도 남편을 볼 때마다 나의 미모를 말하며 은근슬쩍 부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 나는 아주 사소한 말을 그에게 했다. 정말 별다를 것 없는 말이어서 무슨 말이었는지조차 지금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소소한 것이었다. 아마 그도 기억을 못 할 것이다. 그만큼 하찮은 농담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말이 시발점이 되어 사소한 말다툼을 했다. 처음 하는 부부싸움이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우리는 연애하던 시절까지 포함해서 말다툼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내가 토라진 적은 있었지만 다툼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소한 말다툼은 그냥 의례적으로 있는 것이려니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사소한 말다툼이 점점 잦아지고, 잦아지다 보니 좀 더 심해지고, 심해지다 보니 말다툼을 피하려 속으로 묻었고, 그러다 보니 간혹 하는 말다툼은 쌓인 것이 폭발하듯 점점 큰 싸움으로 되고 있었다. 횟수는 늘어나지는 않았으나 그 싸움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는 듯 했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조금씩 피하게 되면서 어느샌가 나와 그의 가슴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작은 응고된 덩어리가 생기게 되면서 말수도 줄어들고 싸움도 줄어들고 우리 관계도 소원해지고 말았다. 아니 서로에게 건네는 일상적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를 슬프게 했다. 처음엔 애를 가질까 했지만 나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고, 여전히 돌쇠인 그를 사랑하지만 내가 이혼까지 생각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기억도 안 나는 말. 우리 말다툼의 시작이 되었던 그 말은 도대체 뭐였을까? 기억도 안 나는 말에 피해의식을 갖게 될 줄이야.
처음엔 그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나를 사랑하던 그 사람은 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속될수록 그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무언가 생각보다 크게 잘못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내 마음을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도 같은 말을 내게 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그도 나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이해’라는 것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소설 속의 시골풍경을 떠올리는 것만큼 희미한지 깨닫고선 서로의 팔을 뻗어 서로의 거리만 확인하는 고통스러운 일의 반복이었다.
“당신은 달의 공기 같아.”
내가 그에게 말했다. 정말 그랬다고 느꼈기 때문에 했던 말이다. 어느 순간 나에게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는 정말 희미했다. 그를 알고 싶기에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곳은 안이 아니었다. 그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보이지도 않는 공기와 같이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난 더욱 그를 찾으려 했고, 그만큼의 좌절을 느꼈다. 그의 속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디 있는지 위치조차 알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그가 나에게 잘하려 하면 할수록 산소가 소비되듯 나에겐 믿음이 소비되는 것처럼 줄어들었다. 내 패를 보여주었는데도 끝끝내 자기 패를 보여주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하는 도박꾼처럼 그가 야속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면 그와 나는 이렇게 힘겨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을 텐데. 힘든 시간을 지속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배달된 전단의 내용이 메모링 프로그램이었다. 한 사람의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는, 현대 과학이 낳은 혁신적 프로그램.
“어쩌면 서로 이해하는데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을지도 몰라.”
전단을 남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남편이 내 손을 잡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남편은 나에게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굳건하게 허리를 곧게 펴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5
"아줌마는 무슨 생각을 해요?"
운전하던 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서 버꾸를 바라보았다. 버꾸는 까만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버꾸랑 차를 타고 목적지 없이 가고 있다. 버꾸가 가져간 지갑은 주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돌려주었고, 결국 내기에서 내가 진 셈이 되었다. 내가 놀이공원까지 가서 놀다 오기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다고 하자, 버꾸는 그럼 잠깐이라도 차를 타고 싶다고 해서 드라이브를 하게 된 것이었다.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와버렸다. 아마 병원에 가기 싫은 마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오늘은 세 번째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가긴 해야겠으나 가기는 싫고 적당한 핑곗거리가 없다가 이 아이를 만나버렸다.
버꾸는 차를 처음 타는 것 같이 신기해했다. 차창을 내리고 올리고, 라디오를 켰다 껐다 하면서 신기해했다. 추운데도 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면서 바람을 맞았다.
“너 참 차를 처음 타는 것처럼 구는구나!”
“버스는 많이 타봤지만, 승용차는 처음이에요. 타 볼 일이 없어서요.”
난 좀 놀랐다. 저 나이가 되도록 승용차를 한 번도 안 타본 아이가 있을 거란 생각은 결코 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야지 승용차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게 되는 걸까? 괜히 아이에게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도 열려요?”
선루프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추울 텐데 하고 걱정했지만, 버꾸는 괜찮다며 열어달란다. 선루프를 열어주자 버꾸는 또 신기해하며 차 지붕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버꾸는 신이 난 듯 소리를 한참 지르고서야 내려왔다.
"넌 혹시 메모링이라고 아니?"
"학교 과학 시간에 조금 배웠어요. 왜요? 아줌마 하시게요?"
"응. 하기로 했는데, 잘 모르겠구나. 오늘이 세 번째 교육을 받으러 가는 날인데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어. 사실 어떤 게 좋을지 잘 모르겠어. 어차피 오늘은 늦은 것 같네."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한다면 난 기타를 아주 잘 치는 사람의 기억을 갖고 싶어요. 언젠가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것을 봤거든요. 기타는 정말 멋진 것 같아요. 드럼보다도 멋지고요. 음~ 피아노보다 더 멋진 것 같아요. 학교에선 재미없는 리코더 따위만 가르쳐요. 난 기타가 좋은데 아직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기타 잘 치는 사람 좋지 않아요?"
"음 글쎄. 에릭 클랩튼 처럼?"
"그게 누군데요?"
"아 너는 모르겠구나. 기타를 아주 잘 치는 사람 있어. 에릭 클랩튼이라고."
"모르지만 좋아요. 에릭 클랩튼. 기타 아주 잘 치는 사람. 기억하고 있을게요."
사실 나도 에릭 클랩튼의 기타연주 능력의 기억을 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직접 기억을 받기는 어렵고 에릭 클랩튼의 기억을 받은 사람이 또 누군가에게 주고 그 사람이 또 누군가에게 주고 해서 몇 번 정도 거친 기억을 준다는 사람들이 사업을 목적으로 음악적인 부분만 부분적으로 기억을 팔기도 했지만 그렇게 여러 번 거치면 큰 의미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관두었다. 놀이공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가는 동안 버꾸는 말이 많아졌다. 계속 나에게 무언가를 질문했고 내가 대답하면 내 대답에 자신의 대답을 더한 다음에 다시 다른 질문을 했다. 왜 오징어 다리는 8개에요? 아니 10개란다. 왜 오징어 다리는 10개에요? 태양은 얼마나 뜨거워요? 아줌마는 아이 있어요? 아줌마는 피자 좋아해요? 미국에 가봤어요? 친구 많아요? 등등 한꺼번에 여러 개의 질문을 하기도 했다. 계속 듣고 있자니 라디오처럼 지루해지면서 다시 병원 생각이 들었다. 정말 메모링이 필요할까? 다시 버꾸가 질문한다. 답하고 다시 병원생각을 하다가 버꾸의 질문을 받는다. 조금 정신이 없다. 그때였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느라고 도로 앞 상황을 못 보고 있었다. 앞의 검은색 승용차가 멈추어 있었고, 나는 승용차 앞부분까지 와서야 그 승용차가 멈추어 있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난 브레이크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가까이 있을 때 브레이크를 밟은 것이다. 난 너무 무서워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약간 정신이 들어서 생각을 해본다. 이때쯤 해서 부딪쳐야 하는데? 왜 아무런 소리도 반응도 없지? 혹시 괜찮은 걸까? 생각하며 고개를 든다. 다행히도 차는 멈춘듯하다. 무언가 차가 부자연스럽기는 했지만, 앞의 검은색 승용차와 거리도 좀 있는 상태에서 멈춘 듯 보인다. 난 옆의 버꾸를 보았다. 버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손을 어떤 기체를 들어 올리듯이 명치 부분까지 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버꾸는 들어 올린 오른손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살짝 '쿵' 소리가 나며 공중에 떠 있던 차가 내려왔다. 높은 높이는 아니었지만 분명 차는 약간이지만 살짝 떴다가 내려앉았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이거 혹시 네가 한 거니?"
버꾸는 말이 없이 창밖만 바라본다. 내 나이 32살에 학대받는 가정에서 태어난 초능력 소년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6
두 번째 상담 때 의사는 둥굴레차를 한 모금 마시며 우리 부부에게 메모링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뇌 활동의 전기적 신호는 컴퓨터가 이진법으로 작업을 수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점이라면 컴퓨터는 0과1의 조합이지만 뇌는 이것보다 훨씬 많은 신호를 사용한다는 것이죠. 너무나 많아서 다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 전기적 신호가 발생하는 위치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급자가 과거를 회상하거나 기억을 떠올리도록 주문하고, 뇌에서 활성화되는 부분을 찾게 됩니다. 직접 모든 기억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모든 기억은 여러 단계로 조금이나마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가령 사람 사는 세상도 누군가의 친구의 친구나 가족의 친구 또는 친구의 동료로 모두 다 연결할 수 있듯이 말이죠. 아주 조금이라도 활성화되는 미세한 부분이라도 RT27이라는 장치는 놓치지 않고 찾습니다. 찾으면 그 부분에 엑스트론파를 이용하여 미세한 신호를 강하게 확대하면 또다시 도미노처럼 기억들이 계속 이어져서 모두 찾을 수 있습니다. 이때 활성화된 부분의 지도는 RT27에 저장되고, 이 저장된 부분은 여러 단계를 거쳐 더 세밀하게 분화됩니다.”
의사가 다시 둥굴레차를 한 잔 마신다.
“여기서 정확하게 이해하실 부분은 저희가 찾아내는 기억의 부분은 굉장히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부분 따로 생각하는 부분 따로 언어영역 따로 이렇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은 서로 굉장히 밀접하게 수없이 많은 작은 선들로 이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휴대전화기에 쓰이는 작은 플라스틱은 결국은 땅이나 바다에서 뽑은 원유를 분별증류하고 여러 화학반응을 통해 플라스틱이라는 물질로 변환시킨 다음, 운반되어 녹이고 잘리고 다듬어지고 색이 칠해지는 동안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진 수없이 복잡한 기계들과 운송장비들의 도움이 필요하죠. 결국, 이 작은 플라스틱조차도 수만 가지의 공정과 관계가 필요합니다. 기억도 마찬가지죠. 조그마한 기억도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죠. 따라서 기억의 부분을 지도로 완성하는 데만도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때 이 RT27이라는 장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이렇게 얻은 한 사람의 기억의 지도 용량 또한 웬만한 도서관 용량이 될 정도로 큽니다. 단지 기억이 아니라 그 기억이 어디 있는지 위치에 대한 정보인데도 말이죠.”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그렇게 해서 완성이 되면 본격적인 메모링을 시작합니다. 이 RT27은 공급자의 뇌에 엑스트론파를 보내어 기억의 위치를 활성화해 뇌가 작용하도록 합니다. 컴퓨터로 치자면 데이터를 CPU가 읽게 하는 과정입니다. 공급자는 잠을 자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억을 읽게 되고 이 읽는 과정을 수급자가 똑같이 읽게 하도록 엑스트론파로 뇌와 뇌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때 반드시 공급자와 수급자는 동시에 데이터를 읽어야 합니다.”
의사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듯 의자를 앞으로 당겼고, 여전히 침착한 말투와 또박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에서 전기적 신호의 변화는 너무 빨라서 현재 만들어진 그 어떤 기계로도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는 0과1의 신호를 빠르게 변화시켜 암호화 하여 전달하는데, 인간의 뇌는 이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빠르게 변화되기에 어떤 기록으로 저장할 수가 없습니다. 읽을 수가 없으니 불가능하죠. 인간이 빛보다 빠른 것을 발견한 최초의 것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인간의 기억을 어떤 장치에 저장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또한 그것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아직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직접 한 사람의 뇌에서 자신의 기억을 읽는 동안, 다른 사람의 뇌에서 동시에 읽으며 전달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재미있게도 수급자는 현재 그 어떤 빠른 컴퓨터로도 읽을 수 없는 이 빠른 변조신호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죠. 사람의 뇌란 알면 알수록 신비합니다.”
7
나는 옷을 고르면서도 메모링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의사가 두 번째 상담에서 했던 말을 잠시 생각해본다.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기억은 대개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기억이라 해도 메모링으로 많은 부부관계나 친구관계에서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나와 같지 않습니다. 메모링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 심는다는 것. 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만든 것과 가능하기에 하게 된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메모링은 전자와 후자중 어디에 속할까요?”
난 혼란스럽다.
“아직은 우리 인간이 모르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두 분 서로 충분히 상의하신 후 메모링을 할지 안할지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난 버꾸를 사 줄 옷을 고르는 중이다. 곧 4월인데 이렇게 이상스럽게 추운 날에 티셔츠 한 장 입고 있는 것이 안쓰럽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친 오지랖이나 친절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야지 그나마 내 마음이 좀 나아질 것 같아서였다. 또 버꾸 덕분에 사고도 무사히 넘기지 않았는가? 난 시장의 노점상에서 두툼하고 조금 무게가 나가 보이는 빨간색 점퍼를 들어서 버꾸에게 건네서 입어보게 했다. 입어보니 제법 잘 어울렸다. 버꾸도 만족한 듯 어색하게 웃는다. 난 점퍼 지퍼를 끝까지 올려서 단단히 채운다.
“이젠 춥게 다니지 마. 알았지?”
버꾸에게 따뜻한 옷을 입히니 보는 나도 좀 따뜻해진 것 같다. 아니 느낌만이 아니라 정말 날씨가 한결 따뜻해진 것 같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버꾸를 보는 나는 마음이 심란했다. 지금 당장 옆에 누구와 상의할 사람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 무거운 차가 떴다가 내려앉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니 이 지구에 할 수 있는 사람은 버꾸뿐일 것이다. 아니면 나의 착각일까? 그냥 무언가에 차가 걸렸던 것은 아닐까? 아니야 아니야 그건 분명 차가 떴었어. 아니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어? 내 착각이 맞나? 혼란스럽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꾸는 웃고 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좀 어두운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굉장히 밝은 아이인 것 같다. 여하튼 버꾸는 가족사니 그 초능력이니 하는 것들로 나에게 충격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그래서 버꾸에 대해 더욱 궁금해진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버꾸는 아빠랑 둘이서 사니?”
“아니요 할머니가 계세요.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니?”
“몰라요.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해요. 바지에 오줌을 싸기도 하고요. 밖에서 페트병 뚜껑을 매일 주워와서 방이든 화장실이든 부엌이든 온갖 곳에 장식하듯 모아놓아요. 이젠 너무 많아서 제가 조금씩 갖다 버리긴 하는데 계속 주워와요. 저도 어느 정도는 포기했어요. 또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소리치며 화내기도 하고요. 그럴 땐 좀 무서워요. 여하튼 좀 그래요. 사람들은 치매래요. 그래도 할머니가 있어서 동사무소에서 돈이 조금 나와요. 뭐 아빠는 그 돈을 뺏어서 술을 사먹긴 하지만요. 그래도 할머니는 그 돈으로 내 밥은 차려주려고 해요. 가끔 까먹기는 하지만 그 돈이라도 있으니까 굶어 죽지는 않았어요.”
버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적인 말투로 이야기한다. 그 돈이라도 있으니까 굶어 죽지는 않았어요. 라는 말을 듣고 있자니 내 가슴이 아팠다. 이제 초등학생인데 벌써 세상을 다 알아버린 듯했다. 아직 겪을 때가 아닌데, 아니 꼭 겪을 필요가 없는 일이 너에게는 일상이라는 생각을 하자니 버꾸가 안쓰러웠다.
“아빠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왔다. 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어른으로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아이한테 겨우 아빠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말 밖에 못하다니. 너무 의례적이고 무책임한 말을 한 것 같아 후회되었다. 잠시 후 버꾸는 양손을 빨간색 점퍼에 넣고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버꾸 아빠는 자존심이 강했다고 한다. 예전에도 성실하거나 부지런하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엄마도 집에 있었다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는 날에는 아무하고나 싸우거나 기물을 파손하기도 했지만, 집에 와서는 가장 노릇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버꾸가 태어날 때쯤 아빠는 공장에서 큰 사고로 다쳐서 다리를 절게 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장에서 나온 보상금은 너무 적었고, 다리를 절게 되자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제한적이 되고 말았다. 자존심 강한 버꾸 아빠는 종이를 접어 봉투를 만드는 일 따위를 하느니 죽도록 술을 마시고 말겠다는 듯 그때부터 술을 매일 마시게 되었고, 그것이 심해지다 보니 매일 밖에서 싸웠고, 가정에서도 주먹을 휘두르게 되었고 그 고난은 고스란히 버꾸 엄마가 지게 되었다. 그래서 매일 아빠에게 맞던 버꾸 엄마가 도망가던 날 새벽에 할머니가 엄마를 봤는데도 잡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빠가 밉니?”
버꾸는 나를 쳐다보았다.
“핏줄이잖아요. 어쩔 수 없어요.”
“그런 이야기는 누가 해준 거니?”
“할머니가요. 할머니는 제가 자존심 강한 아빠를 이해해줬으면 해요. 그게 핏줄이래요.”
난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버꾸가 다시 말을 했다.
“아빠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 있었어요. 어느 날 저녁에 밤에 깨서 화장실을 가는데 아빠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서 있었는데 울고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계속 쳐다봤어요. 매일 화내거나 자는 모습이 아닌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어요. 한참 후에 아빠가 나를 보고서는 내게로 다가왔어요. 칼을 들고요. 너무 무서웠어요. 몸이 얼어서 못 움직일 정도로요. 마음속으로는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움직이지 못하겠는 거에요. 근데.”
“근데?”
“저를 꼭 안더라고요. 너무 세게 안아서 숨을 잘 못 쉴 정도로요. 처음이었어요. 아빠가 나를 그렇게 안아준 것이. 그리고선 내 얼굴을 한 번 만지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뭐라고 설명을 못 하겠지만 그때부터 난 아빠를 조금은 이해하기로 했어요.”
난 버꾸의 손을 잡았다. 버꾸는 만족한 듯 같이 내 손을 잡았다. 묘하게도 그 행동으로 버꾸와 나의 합의점이 이루어졌다. 오늘 병원 상담은 안 가기로 한다. 혹시 몰라서 전화기를 꺼 놓기로 한다. 병원과 남편에게 전화해서 변명할 수 있겠지만, 왠지 모든 게 귀찮다. 오늘 못하면 다음에 상담을 받으면 될 것이다.
옷을 산 후에 난 버꾸에게 이끌려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자신이 안 해본 것들을 같이 해보자며 말이다. 버꾸는 정말이지 안 해본 것들이 많았다. 쫄면도 그중에 하나였다.
“쫄면이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어요.”
쫄면에 감동하는 버꾸를 보자 난 꼭 버꾸를 놀이공원에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어부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치듯 버꾸를 살짝 떠본다.
“버꾸는 또 무엇을 할 수 있어? 초능력 같은 거 말이야. 아까 차를 든 것처럼 또 무엇을 할 수 있지?”
버꾸는 생각하더니 갑자기 버꾸가 나에게 두 손을 펴서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선 다시 손을 오므려서 한 손을 내 입으로 가져왔다. 입김을 불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입김을 불자 버꾸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서 몇 번의 동작을 하고 난 후에 쥐고 있던 손을 폈다. 그러자 그곳에 종이학이 있었다. 버꾸가 말한다.
“마술”
난 버꾸에게 종이학을 받고 고맙다고 말한다. 여전히 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난감했다. 나의 착각인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왠지 섭섭하기도 하다. 그 길로 우리는 백화점을 구경하러 갔다. 백화점 안에서도 추위는 쉬이 가시지 않는다.
“뭘 하고 싶다고?”
“오르는 계단을 타고 싶어요.”
우리는 백화점 10층까지 몇 번을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버꾸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릴때마다 집중하며 신중했다. 생각해보니 나도 어려서 처음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이렇게 주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자연스럽게 타려고 했던 게 기억난다. 별거 아닌데도 혹시 남이 이상하게 볼까봐 자연스럽게 타기 위해 집중했었다. 오히려 그게 더 부자연스럽게 보였으리라. 그렇게 몇 번을 오르고 내리자 버꾸는 만족한 듯하다.
난 버꾸에게 묻는다.
“이젠 뭘 또 안 해봤을까?”
“옛날이야기 해주세요.”
“어떤 이야기?”
“아무거나요. 기왕이면 멋진 이야기로요. 대신 주인공이 다치거나 죽거나 하지 않는 것으로요.”
버꾸와 난 동네의 작은 교회로 갔다. 버꾸는 종교가 없었지만, 교회를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었나 보다. 안 해본 걸 해보자고 했을 때 교회를 가자고 한 걸 보면 말이다. 잠시 기도하려고 들렀다고 둘러대고 긴 나무의자에 앉았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고민하고 있다가 버꾸에게 아까 마술을 다시 보여달라고 한다. 버꾸는 웃으며 같은 마술은 다시 하는 거 아니라고 말한다. 그게 규칙이란다. 그런 버꾸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이야기가 떠오른다.
“너 거짓말쟁이 마호젭스키라는 이야기를 아니?”
버꾸는 아무 말 없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선 다음 말을 기다린다. 아마도 나는 이 아이에게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표정이었다.
8
동부의 외진 작은 마을인 윈다우드에는 마호젭스키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이 마을은 워낙에 외진 곳이라 인구가 300명 정도밖에는 안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다는 표현으로는 정말 부족하게 작은 주위가 온통 산인 마을이었다. 어떻게 이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비교적 이 마을과 가까운 그러니까 걸어서 보름 정도의 거리에 뭔다란 도시가 있었던 시절에 매년 같은 가뭄과 홍수에 허덕이던 참에 일부 지식인들이 신개척지를 위해 마을의 일부 사람들과 떠났다가, 돌고 돌다가 지쳐서 길을 잃고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하게 된 곳이 이곳 윈다우드란 설이 가장 유력하였다.
지금은 다 말라버려 사막이 되어버린 뭔다란 영토에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므로 이 설은 어느 정도 타당성 있는 설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마을 인구가 고작 300명 정도(정확히는 297명)밖에 없었던 것은 그 당시는 잦은 전쟁, 이름도 이유도 모르는 전쟁으로 많은 젊은이가 국가의 이름으로 끌려가 죽거나 아니면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이미 도시라는 곳에 견문을 넓히며 익숙해져 버린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더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어 했던 호기심 많은 젊은이에겐, 윈다우드처럼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사는 좁은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당시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기도 하는 젊은이들도 있었고 매번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마을의 수많은 젊은이가 윈다우드를 떠났다.
그렇게 오랜 전쟁이 끝나고, 현재 윈다우드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 떠나서 노인들이 주 인구 층을 이루고 있었고, 그곳에 몇 명 안 되는 젊은이들 중 한명이 마호젭스키였다. 마호젭스키는 다양한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똑똑하고 활기가 넘치고 재치있는 유머를 할 줄 알았으며 예의 바르고 부지런한 청년이었기에 덕분에 마을 사람들에게선 평판이 좋은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이다. 아니 전부라 해도 될 것이다.
그가 왜 거짓말을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한참 시작할 때 하던 이야기는 외부세상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가령
"어느 마을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살기 때문에 공기가 부족해 질식해서 죽는 사람도 있어요, 그들이 먹고 싼 노폐물을 처리할 길이 없어 온통 도시가 똥냄새가 나죠"
그러면 듣는 나이 든 사람들은 과연 하며 맞장구를 치곤 했다.
"땅끝마을에도 사람들이 사는데 그곳엔 태양이 아주 가까이서 뜨는데 어느 정도냐면 태양이 가까이 있는 동안 곡식들이 자라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죠. 그래서 10모작도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사람들은? 너무 덥지 않을까?"
"괜찮아요. 그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더라고요."
물론 마호젭스키는 외부세계로 나가 본 적은 없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 어떨 때는 몇 날 며칠을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있기도 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마홉이 또 외부로 나갔나 보다고 생각했고, 마호젭스키도 그렇게 행동했다. 왜 그가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는 자기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누군들 자신이 하는 행동에 모든 이유를 댈 수 있겠는가? 언제부터 거짓말을 했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지만 조금씩 했던 거짓말이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듯 했다. 아니면 그 자신은 거짓말 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렇다고 하자. 거짓말하지 말고는 할 말이 없는 그는 거짓말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그러니까 외부세계의 거짓말을 오랫동안 하니 사람들이 이젠 놀라워하지 않았으며, 놀라워할 만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 떨어질 때쯤 되자, 그는 자연스레 다른 거짓말로 옮겨갔다. 그 자신은 돼지의 말을 알아듣는다거나, 자신의 발가락이 9개가 된 사연(물론 그는 10개였다.) 자신은 먹지 않고도 물만 먹고 태양 빛만 받으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식물들을 예를 들어가며 거짓말을 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이 거짓말에도 한계는 있었다. 처음엔 수긍하며 듣던 많은 이들도 결국엔 실제로 보여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보여줄 수 없었던 마호젭스키는 또 다른 거짓말로 둘러대려 했지만, 토마토를 많이 먹었더니 다시 발가락이 나더라라는 말 같은 것은 믿어주는 이가 정말 적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인가는 실제로 혼자서 몰래 오랜 시간을 물만 먹고 버티어본 적이 있었지만, 점점 야위어가는 자신을 보며 결국 실패했다. 그래서 거짓말하지 말고는 할 말이 없었던 그 마호젭스키는 좀 더 거시적인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가끔 꿈속에서 계시 같은 것을 봐요. 자주는 아니고요 아주 가끔 요. 그게 어제인데
어젠 꿈속에서 말라 비틀어진 사과나무가 계속 아른거리더라고요"
그로부터 며칠 간 계속 전형적인 여름의 열기가 계속되자 극히 일부 마을 사람들은 그의 꿈이 신통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든 거짓말이 다 그럴듯했던 것은 아니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끔 엉뚱해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기도 했다. 가령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실은 평탄하지 않고 둥글어요. 너무 커서 모르는 것뿐인데 그래서 강줄기 끝이 희미한 게 아니라 끝이 꺾여 보이는 거라고요"
이런 지구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했다.
하지만 역시 어느덧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그의 거짓말은 약효 떨어진 약발처럼 사람들의 호기심을 이끌지는 못했다. 이젠 그의 우주적인 거짓말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할 때쯤, 마호젭스키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거짓말이 거짓말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거짓말 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시무룩해졌다. 그는 이내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식욕이 떨어지고 생각이 많아져 잠이 잘 안 올 무렵. 어느 날 그가 마을 냇가에 앉아 갈대를 입에 물고 시무룩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그녀가 지나갔다. 젠느! 문득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마호젭스키는 어렸을 때는 같이 자주 젠느와 놀기도 했었던 사이였다. 그녀가 빨래하고 있는 동안 계속 그는 갈대를 입으로 씹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마호젭스키는 어느 사이엔가 그녀 젠느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젠느는 몽유병이 있어서 밤에 잠옷 바람으로 걷기도 한다거나, 바닥에 기어가는 개미 소리도 들을 만큼 놀라울 정도로 신기한 귀를 가졌다거나, 젠느는 촌장의 둘째아들 파시오와 사귀는 사이였는데 그가 외부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아직도 그 사람을 못 잊고 기다리고 있다거나, 그래서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믿었고, 이런 이야기는 삽시간에 마을 사람들에게 퍼져 버렸다. 이것이 마호젭스키를 거짓말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그는 다시 말이 많아지고 활기가 돌았다. 예전에 했던 우주적인 이야기보다 사람들이 더욱 믿었고 재미있어했기 때문에 그의 거짓말은 계속 커져만 갔다. 그는 열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병이 나은 사람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했고, 했고 또 했다. 이미 시작해버린 거짓말을 멈출 수는 없는 듯 보였다.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급기야는 그녀의 등뼈에 커다란 혹이 있어서 젠느는 항상 똑바로 눕지 못한다는 거짓말이 크게 와전이 되어 버리는 일이 생겼다. 젠느 등에 있는 혹은 사람들 입을 거쳐 가면서 점점 흉한 것으로 변해서, 그것이 마치 도마뱀에 있는 날카로운 갈퀴로 말이 바뀌어 갈 때쯤, 젠느는 마을의 재앙을 불러오는 그러니까 청년들을 이 마을에서 떠나게 하는 요물처럼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면서 마을 전체 회의까지 열리자, 마호젭스키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또 다른 거짓말로 이 사실을 무마시키려 했지만, 어느 순간 마을 사람들의 젠느의 이야기는 자신도 모르는 수많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미 커져 버린 이야기는 끝날 기세가 보이지 않았고, 수많은 억측만 낳았다. 오! 불쌍한 젠느
이윽고 모든 추수가 끝난 날 축제대신 마을 긴급회의가 열렸다. 마을 대부분의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촌장이 자기 집 앞에서 주재하게 되었다.
"모두들 조용히 하시오"
촌장은 그렇게 말하곤 옆에 있는 젠느에게 눈빛을 보냈고, 그러자 젠느는 말없이 촌장 앞으로 걸어가서 섰다.
"그래 젠느 어찌 되었건 네가 마을 어르신들이 모든 참석한 이 자리에서 증명을 해주었으면 하는구나. 물론 우리 모두 너를 믿는다만 소문이 소문인 만큼 네가 확실히 해주었으면 하는구나!"
젠느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심스럽게 돌아선 후 윗옷을 올렸다. 그녀의 등에는 매끄러운 피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약간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젠느는 옷을 내리고 내려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 그리고 누가 그런 소문을 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일에는 그 소문의 진상지가 안 밝혀지는 게 원리지만, 이 마을 윈다우드같이 매우 작은 마을은 예외였다. 사람들은 계속 술렁이다가 이윽고 한 지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바로 마호젭스키였다. 대부분이 나이 든 마을 사람들은 마호젭스키를 바라보았고,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난 마호젭스키한테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거 같아. 그러게요. 예전부터 이상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었잖아요. 가령 우리 사는 세계가 둥글다고. 맞아 외부세계에 갖다 온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아닌 것 같더라고. 한번 나간 사람이 다시 오는 경우는 없었잖아? 나한테는 발가락이 9개라고 거짓말 한 적도 있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점점 커질 때쯤, 마호젭스키는 당황하였지만 이내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수군거림이 없어지고 조용해졌다. 사죄의 뜻을 전한 후 그는 천천히 움직여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조용히 아무 말이 없었고, 몇몇 사람만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마호젭스키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마호젭스키는 슬펐다. 그것은 외로움과도 같은 슬픔이었다. 마호젭스키는 이제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이 그를 낙담하게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워낙 착한 사람들이라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를 잘 대해줄 것이지만 그는 다시 시무룩해질 것이며 불면증이 생기고 우울해 할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슬퍼 보였다.
"이젠 어떤 거짓말도 해선 안 돼"
그는 혼자 스스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며 계속 중얼거렸다. 거짓말하지 말고는 할 말이 없었던 그는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는 기분이었다. 거짓말하지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는듯 보였다. 아니 없다. 생각만 해도 우울해지는 기분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때였다. 마호젭스키의 집의 문이 열리면서 젠느가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려 했으나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잠시 마주 선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꽤 흘렀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지?"
마호젭스키는 난처했다. 자기 자신도 왜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를 듣고 싶어서 왔어. 난 너 때문에 며칠 동안을 이상한 소문에 시달리면서 이상한 시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 이유를 들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우린 지금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는 꽤 친했잖아?"
그녀의 억양은 화내거나 따지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녀는 현명했으며 자신이 닥친 일에 정확히 판단할 줄 아는 그런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마호젭스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실대로 나도 몰라라고 말해버리면 아마 그녀는 그가 또 거짓말을 한다고 또는 대답을 회피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마호젭스키는 다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당황한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니 거짓이 되므로 다시 거짓을 꾸며 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젠느는 참을성 있게 그와 시선을 마주친 채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와의 대화가 커다란 벽에 부딪히면서 계속 골똘히 생각하던 마호젭스키는 이윽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실은....."
"실은 누군가에게 아니 너에게 화가 나 있어서 그것을 말하고 싶어서였어"
"화가 나 있었다고? 나에게? 왜?"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을 잘 못했는데 여기서 화가 나 있다는 뜻은 말이야?"
"뜻은?"
그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이내 말했다.
"너를 음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야."
마호젭스키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빈약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잘한 일인지도 모른다. 젠느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조금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현명한 그녀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연히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홍조를 띤 것을 그도 그녀 자신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날 밤 그는 수많은 이야기를 그녀와 나누었다. 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대한 거짓말을 밤새도록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평생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다시 활기를 띨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생겼다. 이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 둘은 결혼하게 되었고, 그에게선 불면증이 사라지고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그렇게 그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가 되어주었다.
9
"이제 그는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버꾸는 큰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본다. 난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글쎄다.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지. 또는 마호젭스키는 고백하는 순간, 아니 그녀가 고백을 받아준 순간 이미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어쨌든 따뜻한 결말이네요?”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버꾸는 고개를 돌려 진지하게 앞을 바라본다. 깊게 생각에 잠긴듯하다. 난 무슨 말을 건넬까 하다가 버꾸가 생각할 수 있도록 기다리기로 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계획하고 출판하기로 계약한 한 신인작가의 작품이었다. 이제 막 신춘문예에 입상한 작가는 작품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게 헤비급 복싱 챔피언 같은 외모의 소유자로서, 거짓말쟁이 마호젭스키의 시놉시스를 내게 보여주었고, 난 맘에 들어 계약했다. 그 신인작가는 그것을 토대로 장편소설을 쓰는 중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버꾸가 다시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난 따뜻한 결말이 좋아요. 슬픈 건 싫어요.”
나는 미소로 대답한다. 나도 너와 같다고 말이다. 내 미소를 보자 버꾸가 다시 말한다.
“난 따뜻한 결말이 좋아요. 슬픈 건 싫어요.”
버꾸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다. 버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쉬이 알 수가 없다. 깊은 눈매가 더 깊어진 듯하다. 버꾸가 다시 말한다.
“슬픈 건 싫어요.”
“나도 그렇단다.”
버꾸는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슬픈 건 싫어요.”
“그래 알아.”
“슬픈 건 싫어요.”
“그래 아니까 그만 하렴.”
버꾸는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다시 또박또박 말한다.
“슬픈 건 싫어요.”
“.............”
“슬픈 건 싫어요.”
버꾸는 시선을 멀리 둔 채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한다. 슬픈 건 싫다고. 슬픈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듯하다. 버꾸는 다시 말한다.
“슬픈 건 싫어요.”
내 가슴이 아프다.
“따뜻한 결말이었으면 좋겠니?”
버꾸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과 자신 주변의 사람들 모두 그랬으면 좋겠다면서.
“그럼 슬픈 건 싫다. 라는 말보다 따뜻한 결말이고 싶다고 말하자꾸나.”
버꾸는 다시 따뜻하고 싶다는 말을 반복한다. 반복하고 다시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 말이 예배당에 울려 퍼진다. 버꾸는 지칠 줄도 모르고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한다. 아직 어린아이가 이런 결심을 할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는 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우리 앞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있었다. 버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기도를 하는 듯 보였다.
“슬픈 건 싫어요.”
10
두 번째 상담 때 의사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었다.
“기억이라는 것은 계속 재생되고 쓰입니다. 모든 제품이 그러듯이 쓰면 쓸수록 그 제품은 변하게 되죠.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이라는 것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어 쓰이는 동안 그 기억은 내 생각이 가미가 되어서 좀 변질된 후 다시 저장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억은 제대로 된 기억이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많은 분이 그렇게 생각하죠. 두 분은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우린 대답을 못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 몰라서였다. 의사는 한마디 한마디를 더 또박또박 발음하며 강조하듯 말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기억은 나라는 사람의 밑바탕이 된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그 어떤 기억도 과거에 혼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나와 같이 살면서 내가 변화하는 동안 같이 변화해가는 것이죠.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기억이란 없습니다. 현재입니다. 메모링은 현재의 나를 있게 해준 기억을 심는 것입니다.”
남편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메모링이 조금은 두려웠다. 먼저 하자고 한 건 나였고, 안 하겠다던 남편을 설득시킨 것도 나지만 왠지 두려운 건 사실이다. 메모링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세 번의 사전상담을 받아야 한다. 오늘이 세 번째 마지막 날이었지만 가기 싫은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렇게 약속을 취소하고 버꾸랑 같이 있으니 말이다. 내가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버꾸는 바이킹을 신이 나게 타고 있었다. 바이킹이 끝나자 버꾸는 나에게 같이 타자고 조른다. 나는 선천적으로 놀이기구를 못 탄다고 설명하지만, 막무가내로 조른다. 계속 조르는 바람에 결국 대관람차를 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무서운 것은 못 타지만 그냥 천천히 물레방아 돌듯 도는 대관람차는 어느 정도 탈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타보는 것이었다. 10년도 넘은 것 같다. 버꾸는 연신 즐거워하며 대관람찬 안에서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높이 올라가니 사람들이 점묘화의 점처럼 작게 보였다.
"넌 어떻게 차를 들어 올렸어? 또 햄버거 가게 안에서 그 여자가 음식을 쏟을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았니?"
난 조심스럽게 묻는다. 버꾸는 밖을 쳐다보면서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고 내게 다른 질문을 한다.
“난 아줌마가 좋아요. 그리고 전 비가 조금만 내리는 날을 좋아해요. 비가 내리는 어두운 낮에는 왠지 나도 보통 가정의 보통 아이들같이 되는 것 같거든요. 아줌마는 어떤 날씨를 좋아해요?”
잠시 난 생각해본다.
곰곰이 생각하던 난 하얀 눈이 두툼한 솜털처럼 내리는 날이 좋다고 말한다.
“왜요?”
“왜냐면 예쁘고 따뜻한 느낌이 들고 또 일 년 중에 몇 번 없잖아? 그러니 특별하잖아.”
내가 윙크하듯 웃는다. 버꾸가 따라 웃는다.
"아줌마 오늘 기분 어때요?"
곰곰이 생각하다가 난 대답했다.
"글쎄다. 어리둥절하구나."
"그럼 나쁘지는 않다는 거네요. 저도 그래요. 전 오늘 기분이 좋아요. 맛있는 햄버거도 먹고, 드라이브도 하고, 놀이기구도 타고, 아줌마랑 있으니까 좋아요."
점차 대관람차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저랑 항상 같이 있어요. 그러면 오늘처럼 매일 즐거울 것 같아요. 행복한 결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웃으며 넘기려 했지만, 버꾸는 그 맑은 눈으로 나를 진지하게 쳐다본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그 말이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당황했다. 버꾸는 진심으로 진지했다. 그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달라는 눈빛이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그럴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너희 집에서 널 기다리는 가족이 있지 않으냐 나도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이 있단다. 안돼! 가족을 그렇게 네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거란다. 아니 나에게 아이는 없단다.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이야기해도 버꾸는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대관람차가 내려오고 우리는 내렸다. 내리자 대화가 끊기면서 이제 그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차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나는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아이한테 친절을 베푼 것이 괜히 아이에게 희망만 심어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아이와 비교하면 힘을 가진 어른들은 때때로 무책임을 발산하기도 한다. 내가 아이에게 괜한 마음만 생기게 한 것 같아. 지금이라도 안 그래야겠다고 나 스스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버릇없는 아이를 다루듯 억지로 차갑게 버꾸를 대한다. 차갑게 말을 하며 아이가 잘 따라오지 못하게 성큼성큼 앞으로 빨리 걷는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보며 빨리 오라고 하면서 시선을 돌린 사이, 서두르며 빨리 걷던 나는 한 중년의 남자와 심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나는 순간 너무 아파 숨이 턱 막히는듯했다. 나는 그렇다 쳐도 남자는 내가 낀 머리핀의 뾰족한 부위에 얼굴을 부딪쳐서 빨갛게 올라왔다. 큰 부상이 일어날 뻔 했다. 남자는 아픈 듯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이 아줌마야 눈은 뒀다 뭘 해? 앙? 이러다 실명하면 어찌할 뻔 했어?”
나는 놀라서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럴 만큼 그 남자의 얼굴은 심하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남자는 아프면서 분이 안 풀리는지 더욱 화를 냈고, 내가 계속 미안하다고 말하자 남자는 얼굴까지 더 상기되면서 짜증 섞인 심한 말을 해댔다. 중간마다 욕이 섞여졌다. 그때 갑자기 일이 벌어졌다. 내가 그렇게 난처해하던 와중에 갑자기 화를 내던 남자는 무엇에라도 심하게 맞은 듯 심장을 붙잡고 ‘헉’하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아아’ 소리만 내면서 고통스러워했다. 당황한 난 괜찮냐며 물었지만 남자는 숨이 막히는 듯 말을 잇지 못했고 이어서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를 흔들어 보았지만, 남자의 얼굴빛은 빨갛다 못해 흙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남자의 입에선 신음만 나왔다.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혹시! 난 순간 번쩍 정신이 든 것처럼 버꾸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버꾸는 한 손을 들어서 주먹을 쥐고 있었다. 버꾸의 짓이었다. 분명했다. 이번 건 착각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자동차를 든 것도 버꾸였고, 저 남자의 심장을 쥐어 트는 것도 버꾸의 짓이다. 버꾸는 초능력 소년이다. 사람들은 쓰러진 남자주변으로 몰려들었고 난 버꾸에게로 달려갔다. 그만 그만 하렴. 버꾸야. 하지만 버꾸는 화가 난 얼굴로 계속 뻗은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쓰러진 사람들 주변으로 웅성거림이 들린다. 난 계속 그만하라고 버꾸에게 말하지만, 버꾸는 그만둘 생각이 없는듯하다. 난 있는 힘을 다해 버꾸의 뺨을 때렸다. 버꾸는 몸이 뒤로 밀리더니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 넘어진 버꾸의 얼굴에서 무언지 모를 표정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서 옆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린다. 쓰러졌던 남자가 다시 숨을 쉬는듯하다. 난 다행이라 생각하고 버꾸를 데리고 사람들이 드문 구석 벤치로 도망갔다. 오는 동안 버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난 버꾸에게 네 능력을 써서 그렇게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버꾸는 화를 냈다.
“아줌마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참을 수 없었어요. 참을 마음도 없었고요. 또 그런다면 참지 않을거에요. 그러다 저 남자가 아줌마한테 보복이라도 하면 어떡하죠?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버꾸는 말을 하다 말고 다시 그 남자로 가려 했다. 그 남자가 나에게 복수를 못하게 하여야겠다며 말이다. 나는 계속 말렸다. 그 남자는 네 짓이란 것을 모를 거야. 그러니 그 남자. 는 나에게 복수할 일은 없을 거야. 라며 말렸다. 버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안돼요. 아줌마가 위험해요. 내가 도와줄게요. 아줌마는 내가 있어야 해요.”
계속 말렸으나 들으려 하지 않았고, 답답한 나는 어른 행세를 하려는 버꾸에게 화난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말았다.
“아니 모르겠니? 난 네가 필요하지 않아.”
그 말을 하고 나자 불현듯 기억이 났다. 아주 먼 곳에 잠식되어 있던 기억. 봉인되어 있던 기억. 그것은 바로 남편과의 첫 말다툼이 되었던 내가 했던 말이었다. 그때 난 약간 토라진 마음이어서 반농담식으로 했던 말이었다. 토라진 내가 그런 식으로 농담하면 내가 삐진 것을 알고 풀어주던 남편이었지만 그날 이 말을 했을 때 남편은 좀 달랐다. 이 말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심한 말을 했을 때에도 농담으로 받아주던 그였는데 이 말에 대해서 그는 좀 달랐다. 그랬던 봉인된 기억이 지금 막 해제되어 나온 것이다. 버꾸는 화가 나 있었다. 버꾸는 소리치며 나에게 말했다.
"왜 내가 필요하지 않죠? 난 아줌마를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아줌마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요. 아줌마가 원하면 하늘에서 눈이 내리게도 할 수 있어요."
버꾸는 화가 많이 난듯했고, 난 덜컥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있자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순식간에 주위가 하얀 솜털 같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날은 점차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고, 하늘에선 갑자기 하얀 눈이 쏟아져 내렸다. 그건 너무 두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내가 아는 상식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 두려움이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난 약간씩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두려워서였다. 버꾸가 무서웠는지 이 상황이 무서웠는지 모르겠지만 난 순간 어둠이 나를 확 덮쳤다. 두렵다. 두려운 난 돌아서서 차가 있는 곳으로 도망가려 했다. 순간 버꾸가 달려와 내 옷을 잡아당겼고, 난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바람에 상의 블라우스가 삼 분의 일이 찢어지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아프다고 느낄 사이도 없이 내 위로 버꾸가 올라왔다. 화가 난 얼굴이었다. 버꾸는 작은 손으로 내 블라우스를 잡아 뜯듯이 벌렸고, 그러자 단추가 모두 떨어져 나가면서 흰 면티가 나왔다. 살에 차가운 버꾸의 손이 느껴지면서 면티가 찢어졌다. 안돼 버꾸야 그러면 안 돼. 하지만 버꾸는 멈추지 않는다. 난 힘으로 버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친 후 일어나서 버꾸를 밀친 후 다시 도망갔다. 내 차까지 어떻게 왔는지 정신이 없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차에 시동을 걸기 위해 핸드백 속의 차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너무 성급해서인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버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착각인지 주변의 여러 사람이 내 차로 모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서너 명이었는데 점점 그 수가 늘어나더니 한 20명 정도의 성인 남자들이 내 차로 몰려들었다. 불행히도 그들은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난 급하게 차 문을 잠갔다. 화가 난 어떤 남자가 내 차를 열려고 시도한다. 앞자리도 뒷자리도. 성난 민중처럼 그들은 차 문을 마구 잡아당긴다. 그리고 들리지 않지만 차 밖에서 나를 향해 고함을 지른다. 차 문이 열리지 않자 갑자기 사람들은 내 차를 둘러싸더니 차를 밀기 시작한다. 차는 심하게 요동친다. 앞 창문에도 어떤 남자가 매달려 나를 향해 욕을 하며 손으로 유리창을 친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난다. 버꾸야 제발~ 제발~ 하고 마음속으로 외쳐보지만 소용없다. 계속 때려대니 유리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뒷좌석의 유리창이 깨진다. 이어서 반대쪽 창문도 깨진다. 그리고선 차 안으로 손이 불쑥 들어온다. 차문이 열리고 누군가 거친 손이 내 목덜미에 닿는다. 난 너무 두려워 눈을 감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친다. 그만! 그만! 그만! 울음이 나온다. 꺼억 꺼억 하며 난 운다. 정말이지 담고 있던 내 속의 물이 전부 쏟아지는 느낌이다. 한참을 운다. 다 울고 난 후에 조용해진 주위를 본다. 아무도 없다. 방금까지도 나를 잡아먹으려 했던 성난 군중은 보이지 않는다. 난 차 밖으로 나온다. 버꾸가 서 있다. 눈물 없이 울고 있는 표정으로 서 있다. 난 버꾸에게로 간다. 한쪽 무릎을 꿇고서는 한 손으로 버꾸 손을 잡는다.
“인제 그만 하려무나.”
하얀 눈이 버꾸와 나 사이로 떨어진다.
“그럼 제 생각대로 하는 거에요?”
버꾸도 울상이 되어 물어본다. 해는 거의 다 졌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날씨는 춥다.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움직이고 있고 하늘에선 하얀 눈이 내린다.
"아니 아니란다. 세상 모든 것을 네 맘대로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단다. 미안하네. 어른들은 나이를 먹으면 복잡해지기 때문이란다.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좀 더 단순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분명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를 먹어버려서 너처럼 명쾌하게 대답할 수가 없네 영준씨"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요?"
"이제 알겠어. 여기가 어디이고 네가 누구인지. 여기가 네 기억 속의 세상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어."
시간이 멈춘다. 먼저 바람이 멈춘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멈춘다. 놀이기구도 멈춘다. 마지막으로 하얀 눈이 공중에 멈추어 선다. 버꾸의 기억 속의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모두 멈춘다. 나는 몸을 떨며 말한다.
“기억이 났어. 결국 난 세 번째 상담이후에 메모링을 하기로 선택했었지. 꿈이 너무 현실같아서 잊고 있었어. 지금이 메모링을 하고 있는 중이었구나.”
버꾸는 내 말을 이해하는지 모르겠으나 아무 말이 없다.
“여긴 네 기억 속의 세상이었어. 너무 춥네. 어떡하지 이런 곳에서 살았다니 안쓰러워서.”
“괜찮아요. 전 익숙해졌는걸요.”
내리는 눈보다 멈추어 있는 눈이 더 예쁘다.
“난 아줌마를 가질 수 없는 건가요?”
나는 나의 돌쇠를 쳐다본다. 아니 돌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바라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란다. 가질 수 있나 없나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아니란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죠?”
다시 그 표정이다. 나를 진심으로 대해 달라는 표정. 나는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한다.
“나도 모른단다. 그래서 나도 그것을 찾아보는 중이야.”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가만히 있던 버꾸가 한 손을 위로 올린다. 그러자 멈추어 있던 눈이 위로 올라간다. 땅에 쌓여있던 눈들도 하나씩 올라간다. 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른다. 그 광경을 나는 쳐다본다. 아름답다. 남편의 기억 속 세상은 이랬다. 남편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것은 남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아니었다. 난 이제야 남편의 어린 시절을 그동안 모르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나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세히 해준 적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건 나도 그의 어린 시절을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그의 모습만이 나에게 중요하다는 무의식적인 이기적인 마음이 작용해서였는지 모른다. 어쩌면 난 매우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남편에게 미안했다.
“기억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나와 같이 살면서 내가 변화하는 동안 같이 변화해가는 것이죠.”
난 하늘을 바라본다. 눈이 오르고 있는 하늘을. 그리고 다시 버꾸를 바라본다. 버꾸는 돌쇠고 돌쇠는 영준씨고 영준씨는 내 남편이다. 버꾸가 말한다.
“난 아줌마를 가질 수 없는 건가요?”
"기타를 쳐주렴"
"기타를 칠 줄 몰라요."
여기는 너무 춥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어두운 밤의 놀이공원 한복판에서 흰 눈이 오르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귀를 기울여본다.
11
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만든 것과 가능하기에 하게 된 것에는 차이가 있다. 내가 살면서 알아야 할 우주의 법칙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모른다. 그저 상식이라는 단어가 나를 바로 세워주고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기를 바랄뿐. 장면은 지나가고 사물도 지나가고 소리도 지나가고 사람도 지나가고 관계도 지나가고 용서도 지나가고 나도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그렇게 지나간 것들은 세월의 노화와 풍화와 부패와 화학작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분해되어 수없이 많은 작은 원자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 후, 그 중 극히 일부는 식물의 광합성으로 잡히어 포도당의 재료가 된 후 과일 속에 들어가고, 그것은 다시 누군가의 뱃속에 들어간 후 그 중 일부는 그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가 될지 모르겠다. 그런 일이 일어날 거란 나의 상식이 옳다면, 내가 배운 것이 맞는다면, 가볍게 매만진 내 손등의 피부의 살이 먼지만큼 떨어져 나가서, 그 속의 원자들이 여러 단계와 먼 거리를 거쳐 잠시라도 당신을 구성하는 원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주 조금, 아주 잠깐, 당신의 일부가 되는 것이 그리 큰 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차피 당신의 몸과 나의 몸은 똑같이 99퍼센트가 탄소와 수소와 산소라는 겨우 세 가지 원자로 되어 있으니, 어쩌면 당신과 나의 차이점은 기억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무거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질텐데. 당신을 떠나는 내가 한결 가벼울텐데.
12
남자는 잠에서 깬 후 병실에서 일어나 따뜻한 둥굴레차를 마신다.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만난 작은 불빛처럼 차의 따뜻한 기운이 몸으로 들어온다. 이 남자의 머릿결은 타고난 듯 윤기가 흘렀고, 단정했다. 우성인 관계로 세대를 거듭할수록 곱슬머리가 많아져 현재에는 이런 머릿결을 가진 사람은 흔하지 않다. 여의사가 또각또각 하이힐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
“기분은 좀 어떠세요?”
꽤 좋은 머릿결의 이 남자는 대답 대신 둥굴레차를 한 모금 더 마신다.
“메모링 했던 예전 기억을 다시 메모링 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만 모든 메모링 과정이 잘 되었습니다. 아내분도 모두 끝나고 남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분 서로 앞으로도 좋은 추억 만들어가기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여의사는 다시 하이힐의 경쾌한 소리를 내며 왔던 문으로 나간다. 남자가 서 있는 창가로 햇살이 들어온다. 긴 잠에서 깨어 맞는 햇살이 그를 기분 좋게 만든다. 창밖을 내다본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양한 색깔들과 모양들이 각양각색이다. 추위는 한풀 꺾였으나 아직 완연한 봄은 아닌듯하다. 남자는 다시 꿈을 꾸려는 듯 눈을 감는다. 여잠은 쉬이 오지 않는다. 남자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다. 그리고 내 병실로 나를 찾아왔다가 내 병실 침대에 놓인 메모를 본다.
“먼저 집에 갈게. 집에서 봐”
남자는 마지막으로 의사와 면담한 후 주의사항을 듣고 퇴원 절차를 밟은 후 집에 돌아온다. 난 그를 위해 청국장을 끓인다. 옛날 뚝배기 그릇에 물을 끓인 다음, 무를 썰어 넣어서 국물을 시원하게 만든 후, 청국장을 아낌없이 듬뿍 넣는다. 청국장을 많이 넣은 만큼 소금은 아주 조금만 넣는다. 그리고 청양고추를 조금 썰어 넣고, 마지막으로 대파와 마트에서 직접 손수 만들었다는 두부 한 모를 넓고 크게 잘라 넣고 부글부글 끓이니, 진하고 구수한 냄새가 집 전체에 풍긴다. 맛을 보니 후다닥 만든 것치곤 꽤 맛있다. 이젠 제법 나이 든 어르신들처럼 음식 맛을 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난 한 번 이혼했다. 그리고 곧 마흔이 되는 나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누군가 그랬지. 나이가 들수록 기억의 밀도가 감소하다 보니 세월이 유수와 같이 빠르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청국장에 약간의 밑반찬을 더한 후 병원에서 메모링이 끝나고 퇴원한 남편과 나는 늦은 아침 식사를 한다. 아이들은 친정집에 가 있다. 청국장을 한술 크게 떠서 입에 넣으니 입천장이 델만큼 너무 뜨거워 순간 조금 놀란다. 뜨거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때 남자는 퇴원한 후 처음 나에게 말한다.
“당신은 해봤지만 난 메모링이 처음이라 낯선데? 어떻게 이렇게 현실처럼 느껴지지? 색다른 경험이었어.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그래도 하길 잘한 것 같아.”
“다행이야.”
현재의 남편인 이 남자가 나에게 메모링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 난 거부했었다. 우리 둘 사이에 아무런 문제는 없었지만 남자는 나를 더 알고 싶다며 하기를 바랐다. 특히 전 남편인 영준 씨와 헤어진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다. 왜 둘은 이미 헤어졌는데 지금까지 친구처럼 간혹 연락하며 지내는 게 자신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남편은 질투하듯 말했다. 하긴 나도 그 이유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남편의 요구가 질기게 느껴질 때쯤, 망설였지만 마지못해 난 모든 기억이 아닌 전 남편과 메모링을 했던 기억을 현재의 남편에게 메모링했다. 몇 년 전에 처음 해 본 메모링으로 읽었던 영준 씨, 아니 버꾸의 기억을. 그 초능력 소년을 만났던 기억을 현재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메모링을 하기 전에 전 남편인 영준 씨의 허락이 먼저였다. 한 달 전 내가 조심스럽게 영준 씨에게 말을 건넸을 때, 그는 조금 망설였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괜찮다고 허락했다.
우리는 청국장에 밥을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했다. 메모링 했던 기억에 관한 이야기, 병원에 관한 이야기, 내가 에릭 클랩튼의 기억을 메모링한 이야기, 주변 친구들 이야기, 일에 관한 이야기 등등이었다. 여러 이야기를 돌고 다시 메모링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안 물어봤으면 했지만 난 크게 개의치 않으면서 대답했다. 난 입안에 한때 데일 만큼 뜨거웠던 청국장 맛을 음미하며 삼킨다. 그리고 난 그 남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때?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남편과 저녁에 다시 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 후, 난 새로운 신인작가를 만나러 간다. 현재 난 포스트모더니즘 스릴러의 흐름을 주도한 작가 편이란 프로젝트를 하는 중이었고, 오늘 만나려는 작가는 그 부분의 선두주자라는 말과 함께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작가이다. 인터뷰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한 후 성사된 어려운 만남이라 다른 시간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메모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건 후에 액셀을 밟는다. 차를 운전하며 난 생각한다. 이미 헤어진 사람. 나는 완전히 그를 이해하게 되었을까? 돌쇠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 아니 돌쇠이어야 했던 사람. 차는 점점 속도를 더해 간다. 메모링이 끝나고 헤어지기로 마음먹고 그 사람에게 말했던 날. 돌쇠는 완고했었다.
“안 돼! 이런 슬픈 결말은 싫어. 아니 네가 슬픈 것도 싫어.”
돌쇠의 눈동자가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난 완고했던 돌쇠를 여러 번 말을 하여 설득시킬 수 있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 말이 맞았다. 난 슬픈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남편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돌쇠는 나에게 연락했고 나를 응원해줬다. 전화기 건너편 그의 목소리는 항상 밝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까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돌쇠는 여전히 따뜻한 결말을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강한 사람이다. 아니 그렇다고 믿을 수 밖에.
“끼익~”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바람에 브레이크가 늦었다. 내 차가 앞차를 받고 말았다. 쿵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추었다. 난 차가 부딪치는 순간 관성으로 핸들에 머리를 받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다. 머리가 조금 아픈 것 말고는 크게 다친 데는 없는 듯 보인다. 앞차에서 한 남자가 내려서 내 차로 다가온다. 그리고 뭐라고 큰 소리로 말을 한다. 하지만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계속 말하다가 답답한 듯 차의 창문을 내리라면 손짓을 한다. 난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다. 남자는 한쪽 팔을 차에 기대고선 허리를 숙여 나를 향해 다시 큰 소리로 무어라 말한다. 화가 난 듯하다. 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난 사고를 핑계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울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