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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우주의 계획(소설)

       

 

 

 

 

제목: 우주의 계획

 

 

                                           1

 "그래 넌 아직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다고 믿는 수밖에요. 제가 움직이건 움직이지 않건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다만 움직이면서 답을 찾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에 가까우니까요."

2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이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 다시는 못 볼 작별의 시간.

 "나는 죄인이야. 그동안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내 맘대로 뺏어버렸지. 해서는 안 될 일이었어."

2호는 평상시와 달리 얼굴에 미소가 없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지만, 방법이 없구나.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 후회하고 있어.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지. 그런 짐을 너에게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2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시선을 돌린다. 아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동안 여러 차례 물어봤던 것을 다시 한 번 묻는다.

 "아직도 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계획돼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들의 물음에 2호는 대답할 수 없다. 아니 대답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아들은 떠날 준비를 마친다.

 "보이는 것을 보지 마라. 보이는 것은 이미 늦었다."

아들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그리고 미소를 보낸다.

 "제 이름은 이제 카알이에요. 기억해주세요."

 "그래 카알. 기억하마."

세상은 바뀔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카알은 수없이 반복되어온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자 한다. 그의 계획이 성공이건 실패이건 그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임이 확실하다.

 

 

                                                  

 회의는 지루하게 몇 시간째 지속하였다. 의견은 하나로 모일듯하다가 다시 결렬되기를 반복하였다. 이번 회의를 포함해서 벌써 몇 번째 결렬되면서 몇 달 넘게 끌어온 회의였다. 덕분에 회의장에 모인 과학자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어서 이제는 어찌 되었든 결정을 내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생각하면 여전히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1호는 벌써 커피를 다섯 잔째 마시고 있었고 담배는 한 갑 가까이 피웠다. 새 담배를 입에 한 대 물었다. 불을 붙이려다 이내 관둔다. 다시 주위를 환기시키고 말한다.

 "저번 회의에서 확인했다시피 오늘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선 5호가 공개에 대해 가장 많이 반대한 것으로 아는데요. 5호는 이 프로젝트를 공개하는 것이 절대 불가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절대 불가하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런 성과를 우리만 알고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은 수많은 생명에 대한 불손일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아직 우리는 충분한 사회적 데이터와 경험이 부족합니다."

결론 없는 담론이 오고 갔고, 회의의 분위기는 희뿌연 안개로 가득 차 언제 끝날지 모르고 있었다.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갔다.

오래전이었다. 비밀 프로젝트는 각국의 권위 있는 몇 명의 과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유한한 환경과 물질, 에너지 사이에서 모든 종(種)은 다른 종과의 피할 수 없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진화를 거듭해왔고, 경쟁 속에서 진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을 것이다. 그런 진화는 생물의 거듭된 죽음으로써 완성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 개체 안에서 작은 진화, 즉 환경에 이로운 유전자 변이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다른 개체가 죽지 않고 영생(永生)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이 진화는 퍼지지 못하고 한 개체 안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개체의 죽음으로 생기는 공간을, 유전자 변이가 일어난 개체가 그 자신의 유리함으로 오래 생존하고 자손을 더 많이 퍼트려서 메꿀 수 있을 때, 그 변이된 유전자는 퍼지게 되고 진화가 성립될 수 있었다. 모든 생물이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 선택했다기보단 이렇게 진화한 종족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즉 늙으면 죽는 것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최고의 진화였다.

하지만 이미 모든 생물의 종에서 완전한 우위를 점했고, 그게 깨질 염려가 없는 상태인 인간에게 더는 한 개체의 죽음과 다른 개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진화는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 개체를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면 좀 더 완벽해지지 않을까? 아주 오래전 종족보존에는 실패하였지만 영생하는 생물체가 있었을 것이다. 영생이라는 덕분에 진화에 더디어 결국 도태했겠지만 그런 유전자를 가진 생물이 있었을 것이다. 노화와 죽음이라는 진화를 겪기 전의 생명체 말이다. 프로젝트는 여기서 출발하였다. 한 개체를 죽음으로부터 분리하는 것. 즉 영생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가 택한 방법은 바로 유전자의 완벽한 해석이었다. 10만 개의 유전자에서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세포의 주기에 관한 것이었다. 생물의 몸은 일정 주기가 되면 세포분열속도가 느려지면서 새로운 세포보다 오래된 세포 수가 증가함으로써 죽음을 반복하는 패턴이 있었고, 모든 규칙적인 패턴은 계획돼 있는 것이고, 그 계획은 생물체 내에서 유전자에 의해 설계되어 있을 것이다.

 "답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그것을 찾는 일은 시간문제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다."

1호는 확고했다. 모두 그렇게 믿었다.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그 옛날 20대의 대학원생이었던 왓슨과 크릭이 처음 DNA 구조를 밝힌 후부터 인간의 영생은 이미 초읽기를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유전자 지도, 유전자 재조합, 분열과 분해, 생명공학, 원생동물, 세균과 바이러스, 방사선, 전사와 번역, 돌연변이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모든 실험이 진행되었다. 초창기 지구의 영생하던 생물의 형태로 되돌리려는 노력이었다. 12명의 과학자는 자신들의 죽음보다 먼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1호가 처음 제안했을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과학자는 별로 없었다. 12명의 과학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 프로젝트에 쏟아부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도저히 다다를 수 없다고 생각했던 부분에 도달했던 것처럼, 몇몇 흔하지 않은 천재들에 의해 이 프로젝트는 결국에 그곳에 도달하였다. 

 "이것이 공개됨으로써 찾아오게 될 사회적 파장을 인류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부작용 또한 충분히 설명해서 모두 아실 거라 생각되지만 실제로 그런 부작용이 어떻게 발현될지는 아직도 미지수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중할 뿐이지 공개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5호의 마음은 여기 모인 12명의 과학자의 마음과도 같았다. 확신을 한 사람은 없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애초부터 그들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사안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답답하군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생산성 없는 회의를 계속할 겁니까?"

12호는 탁자를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모든 시선이 12호로 향했다. 

 "어찌 보면 결정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우리는 단백질로 이루어진 이백만 종의 동물들 중의 하나입니다. 각자의 생물들은 극한 환경이나 경쟁을 이기기 위해 하나의 감각들을 발달시키며 진화해왔습니다. 그중에 인간은 뇌를 발달시켰지요. 그렇게 진화해온 모든 생물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종족보존입니다."

12호는 그의 성격대로 앞이 안 보이는 짙은 안갯속을 빠른 속도로 정주행했다. 

 "종족보존은 모든 생물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입니다. 우리는 그런 종족보존의 마지막 단계에 와있습니다. 적어도 인간에게는 죽음과 탄생으로 이어지는 진화가 더는 종족보존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과의 경쟁을 뛰어넘었으니까요. 이제는 영생이야말로 종족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마무리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본능을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다른 사람의 본능을 거부할 권리도 없습니다. 이것의 공개로 인해 생기는 그 후 사항까지 우리가 제어하려 한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요."

우리는 신이 아니다. 회의의 안개는 여전히 걷힐 줄 모르고 있었다.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었다. 회의는 서로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 말고 소득이 없었다. 결국 1호는 다시 담배를 한대 물고 불을 붙였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2

 과학자 12명이 속한 G.N27에서 중대 발표를 하기 전에 이미 조금씩 소문이 났다. 실제로 아는 사람도 꽤 되었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큰 소요가 날 것을 우려해 미리 연구 결과를 조금 유출한 것이다. 영생 프로젝트는 건강하고 젊은 세포의 빠른 세포분열이 병든 세포의 자리를 메꿈으로써 대부분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있었다. 이런 대단한 과학연구 결과 발표는 영생 프로젝트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여러 나라의 정부 최고위층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무대는 마련되었다. 오늘은 정식으로 영생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날이고, 곧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될 예정이다. 1호는 다시 원고를 훑어봤다. 이미 수십 번을 봤고 고쳤다. 어려운 전문 용어는 모두 생략했고 전 세계 인류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즉 자신들이 알아낸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로 인해 앞으로의 인간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 영생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쓰였다. 적어도 1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옆에서 보던 2호가 말했다.

 "자네는 어떤가? 나는 처음 영생 프로젝트가 성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긴장된다네."

 "나도 마찬가지이지.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예상조차 되지가 않아. 예상할 수 없는 것은 항상 사람을 긴장시키고 두렵게 만들지."

2호와 1호는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동료이자 친구였다. 초창기 때 1호가 2호한테 영생 프로젝트에 합류할 것을 요청하려고 할 때 2호는 설명도 듣지 않고 바로 수락했다. 그런 그를 보고 1호가 너무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다고 지적하면 2호는 그게 자네와 나의 차이라며 웃어넘겨 버렸다. 그런 2호의 표정이 지금은 조금 복잡해 보인다.

 "나는 이 연구를 위해 내 평생을 받쳤네. 하지만 이제 그 세월은 내 평생이 아니게 되었지. 그만큼의 시간은 내 인생의 반절도 아니 십 분의 일일수도 아니면 아주 작은 일부의 시간일 수도 있겠지. 자네는 이런 생각 해봤나? 그런 생각들이 내 삶을 3차원이 아닌 1차원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 같아. 그런 느낌을 아는가?"

1호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2호를 쳐다봤다. 2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찾다가 이미 노화에서 돌아온 눈은 더는 안경이 필요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만둔다.

 "자네 이상한 생각을 하는군."

 "내가 절대 안 죽고 평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전에 있던 많은 가치가 순식간에 자리이동을 해버리는 느낌이야. 내가 인식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예를 들면?"

 "많아. 가령 기타를 치는 것?"

 "기타는 왜?"

 "나는 기타를 칠 줄 모르지만, 항상 언젠가 배우고 싶어했지. 아마 어렸을 때 살아계셨던 어머니가 들려주시곤 해서 나에겐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어.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언젠가는 기타 치는 것을 배우고 싶었네. 나의 작은 희망 사항이었지. 하지만 영생이 내 삶에 끼어든 지금 나와 기타를 엮어주었던 가치라는 것은 없어져 버린 것 같단 말이지."

 "왜? 왜 가치가 없어져 버린 느낌을 받는 거지? 이젠 기타를 칠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는데?"

 "그래서인지도 몰라.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무한하지. 그 시간의 무한함이 주는 무게감이 다른 것들을 압도해버리는 게 느껴져.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기타의 자리를 빼앗고 정해져 있는 질서를 흩트려버리는 거야. 자석에 의해 재배열되는 쇳가루들같이 말이지. 그동안 쌓아놓았던 모든 규칙은 영생 앞에서는 작은 일부분이 되고 마니까 말이야. 그것은 나의 의지와는 또 다른 것 같아.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말이야."

1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2호의 말은 이해가 갔으나 설득력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방송국 담당자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린다. 1호는 알았다고 말한 후 2호한테 말한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날걸세. 자네의 그 기타도 그중에 하나일 것이고 말이야. 그것보다 좀 더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거야. 다만 이 프로젝트의 결과는 우리 12명이 감당하기에는 무게가 너무 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모든 사람에게 알려서 나누고 결정해야 할 일이지."

"나도 인제 와서 반대하는 것은 아니네. 다만 두려울 뿐이야."

"무엇이?"

"구체적인 것은 모르겠네. 다만 예상할 수 없는 것은 항상 사람을 긴장시키고 두렵게 만들지."

"방금 내가 했던 말이군."

"그래"

"분명 좋아하고 반드시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을걸세."

"가령 예를 든다면?"

"글쎄. 전 세계에 머리가 빠진 사람들?"

"그렇겠군."

1호는 원고를 챙긴다.

"나는 발표를 하러 가야겠네. 발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지?"

2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다.

"좀 웃게나. 그 오랜 세월 동안 자네의 웃는 얼굴을 본 지가 오래되었군 그래."

하지만 이번에도 1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방을 나선다.

이미 많은 취재진이 몰려 있었다.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 중이다. 1호는 차분히 단상에 섰다. 그리고 원고를 책상 위에 펼쳐서 놓았다. 한 번 심호흡을 한 후에 차분히 준비된 원고를 읽어 나갔다.

"친애하는 전 세계 여러분. 이런 역사적인 발표를 하는 때를 같이 하게 되어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발표하는 것은 그동안 유사 이래 있었던 수많은 과학적 업적으로도 도달할 수 없었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나가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며, 인류가 이룩할 수 있는 앞으로의 업적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아무도 이런 ................"

연설은 10분 만에 끝났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3

 당연하겠지만 세상은 크게 동요했다. 전 세계 사람들은 환호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일이었다. 각 나라는 연일 특종이라 보도하며 떠들썩했다. 몇 달 동안 모든 방송의 첫 머리기사 뉴스를 장식했을 정도였다. 각 단체와 전문가들은 모두 환영의 견해를 밝혔다. 혹자는 인류가 가질 수 있는 것 중에 이 이상의 축복은 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표현을 했고, 누군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꿈이 지금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축제의 장을 열었다. 모든 질병으로부터 해방이었고, 모든 근심으로부터 해방이 왔다며 지칠 줄 모르고 축제를 벌였다. 물론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로 인해 약간의 소요사태는 일어났지만, 기술이전은 미리 준비된 대로 빠르게 이전되었고, 각국의 나라들은 계획표를 세워 빠르게 영생 프로젝트를 실행한 덕분에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소요사태는 멈추었다. 그 기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슬픈 기억은 앞으로 다가올 찬란한 미래에 의해 잊혔다. 작가들은 영생에 대한 글을 썼고, 음악가들은 노래를 만들었고,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으며, 정치가들은 논평했고, 종교인들은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방송에서는 영생 프로젝트에 대한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행복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끼리 웃으며 인사했고, 친구들끼리 또는 가족이나 동료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며 행복한 표정들을 지었다. 전에 잘 연락 안 하던 사람까지 연락하며 더 많은 사람과 행복을 나누려 했다. 앞으로 길어진 시간에 대해 준비를 하는 듯이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사회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었던 변화와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다양한 변화가 찾아왔다. 외과나 산부인과 등을 제외한 병원들이 문을 닫았고, 제약회사, 가발공장, 노인요양원, 장례식장, 건강식품들, 종신보험 등등이 없어지거나 대폭 축소되었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의 내용도 많은 부분이 수정되어야만 했다. 한살이 과정에 인간은 더는 포함되지 않았다. 은행들의 금리 정책도 바뀌었다. 더 오랜 기간의 장기예금 상품이 나왔으며, 미래를 낙관하는 분위기 속에 금융가는 전에 없는 호황을 누렸다. 각국의 출산장려정책과 연금정책은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했고, 이혼이 늘어남과 동시에 결혼에 대한 분위기도 점차 바뀌게 되었다.

또한, 예상치 못한 변화 중에 하나는 영생을 얻게 된 사람들이 음악을 이전보다 훨씬 많이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장르만 듣던 사람들도 대부분 다양한 장르를 듣게 되면서 이유는 알기 어려우나 음반 업게는 빠르게 성장했고, 음악은 사람들의 생활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선진국들은 좀 더 친환경적인 에너지에 비중을 더 두기 시작했으며, 환경보호가 크게 대두하였다. 그리고 죄수의 관리도 문제가 되었다. 무기징역자들에 대한 처리가 골치였다. 그러나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일자리 문제였다. 누군가는 평생을 살기에 계속 일해야 했고, 누군가는 처음 사회로 나와서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야 하는데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었다. 퇴직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앞으로 다가올 문제에 비하면 큰일은 아니었다. 예측할 수 있지 않은 변화라 하더라도 인간이 그동안 역사 속에서 보여준 적응력이면 변화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적응하는 방향의 문제였다. 한 번 잘못된 방향으로 적응된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이상향으로 물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자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모든 나라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왜 그런지 각국의 범죄율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에는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모두 깨닫기 시작했다. 각국의 범죄가 갑자기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증가하는 범죄를 막고자 여러 대책을 내놨지만, 소용이 없었다. 범죄율은 끊임없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큰 도시에서도 작은 도시에서도 절도와 강도, 폭력, 사기, 횡령 등이 점점 늘어갔다. 전 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어느 나라도 예외는 없었다. 밤이 되면 거리마다 폭력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규모와 수가 증가하는 것이 공권력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기 시작한 곳도 생겼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영생으로 삶이 나아질 줄 알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영생으로 인해 각자의 삶이 얼마나 거대해 졌는지를 말이다. 영생을 얻게 된 인간의 삶은 전에 없이 무겁고 혹독해졌다.

예전에는 누구나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지만 이젠 아니다. 평생을 살 수 있기에, 삶 전체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할 수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누군가가 가난하고 힘든 삶을 견디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나의 끝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가난하게 또는 힘들게 살고 있다면 이러한 삶을 얼마나 더 오랫동안 지속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계획할 수 없다. 수십 년?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각자의 삶에 너무나도 무거운, 도저히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은 두려움을 낳는다. 수많은 사람은 두려웠다. 누군가는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바꾸려 했다.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면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양심은 버림을 받기 시작했다. 너무 무거운 삶 속에 잠깐만 양심을 버리는 거라 자신을 스스로 위로했다. 이렇게는 그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없다. 바꾸어야 한다. 처음에는 조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뿐, 그들은 그러한 연유로 인해 불법적인 일에 쉽게 빠져들었다. 이것은 한쪽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실제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현재는 넉넉하게 살고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영생하게 된다면, 현재 가진 재력으로 가능할까? 나의 재산이 물가상승을 따라갈 수 있을까? 부자들은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유한한 숫자를 무한대로 나누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계산은 당연히 적자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돈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충분하지 않게만 느껴졌다. 그것이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비루한 누군가의 삶이, 영생 속에 언젠가 자신의 삶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가족을 위해서라며 양심을 잠시 버리기로 한다. 독점과 로비가 더욱 성행했고, 비리와 부패 또는 뇌물이 이권을 사이에 두고 오고 갔다. 투기와 사채는 더욱 극렬해졌고, 권력과의 결탁은 심해졌다. 조금이라도 더 부를 축적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였다. 방식만 다를 뿐 또 다른 형태의 절도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각 계층 간의 마찰은 심해졌고, 그에 비례해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일어났다. 점점 약육강식의 사회로 변해갔다. 인간은 가장 이성적이 되어야 하는 순간에 이성적이 될 수 없었다.

 

 

 

 

 

 

 

 

 

 

                                                            4

 

지구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지키려는 자와 전복시키려는 자들 사이의 싸움이었다. 점점 사회는 폭력적이 되고, 사회기능들이 일부 멈추기 시작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일부에서 양심 있는 소리를 내놓기 시작했다. 더불어 사는 사회, 베풂, 사랑, 용서, 정직 등을 외쳤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의 양심 있는 말에 공감했다. 그리고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것을 알고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고 해야 할지 구분이 모호하나, 알고 있다고 한다면 앎과 행동 사이에는 쉽게 건너지 못하는 깊은 낭떠러지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했다. 

사회가 여러 갈래의 무리로 나누어져 싸움을 지속하고 그 정도가 점차 강해졌으며, 서로 가해자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표출해낼 대상을 찾았다.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누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곳곳에서 정부에 대한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는 열병처럼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군대가 동원되고 각종 테러가 성행했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그 강도와 규모가 커졌다. 부족단위의 나라에서는 전복되는 경우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각국의 지도자들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시위의 규모는 점차 커졌고,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의견을 한 곳으로 모을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분노의 대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한번 굴러떨어지기 시작한 바윗덩어리가 끝에 낭떠러지가 보이지만 멈추지 못하고 결국에 그곳에 도달하듯, 한 번 시작된 두려움은 멈추지 못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극히 위험한 형태로 표출되어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이전까지만 해도 한 국가 안의 사태는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했다. 가장 폭력적으로 변해버린 것은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실로 끔찍했다. 힘이 강한 나라는 힘이 약한 나라를 무력으로 무너뜨렸다. 이유는 자국의 안녕과 발전을 내세움으로써 자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영생에 대한 막대한 무게감을 이겨내기 위한 나약함이, 다른 나라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났다. 힘이 약한 나라도 더 힘이 약한 나라를 무너뜨렸다. 수많은 무기가 동원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동맹을 맺어 함께 싸우는 나라도 생겼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그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간이 그동안 쓰지 않고 축적해둔 어마어마한 무기가 창고에서 해방되어 지구로 나와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세상은 영생을 얻기 전보다 죽는 사람이 많아지는 괴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지금의 사태는 유사 이래 개체보존이 종족보존을 가장 많이 앞서는 일일 겁니다."

12호는 울분을 토하듯 책상을 큰 두 주먹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덕분에 책상 위에 있던 커피가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제어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고 했던 12호지만, 처참한 광경 속에 지금 이 순간은 신이라도 나타나 제어가 되기를 바랐다. 지구 곳곳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가 열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12호가 2호한테 물었다.

 "아무것도. 우리는 단지 예전의 상태로 되돌렸을 뿐이지. 죽음이 없어 제대로 진화하지 못해 자멸한 생물형태로."

 "그래도 인간은 좀 더 이성적인 생물이지 않나요?"

 그때 5호가 황급히 전화기를 들고 뛰어왔다.

 "전국 계엄령 선포랍니다. 민간인 차출명령까지 내려졌습니다. 저희는 특별관리자로서 지금 당장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라는 지시입니다."

 "이런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돼지 새끼들."

12호가 분노하는 가운데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누구도 이런 결과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침묵 속에 1호가 말을 이었다.

 "저도 얼마 전까지 12호처럼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틀렸군요. 인간은 이성을 쓸 수는 있는 동물일 뿐이군요"

 12명의 과학자는 좌절했다. 과학 안에서도 과학이 메꿀 수 없는 큰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구는 점차 제어력을 잃어버렸다. 영생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만들었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불안함으로 그리고 그 불안함은 폭력으로 이어지고, 그 폭력은 이제 자멸의 길로 들어서려고 하고 있다. 

 

 

"우리의 계획은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회의실 안에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의 1호는 대답이 없다. 그런 그를 보고 있던 2호가 대신 대답한다.

"계획을 세운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지."

죄책감인지 안타까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온갖 감정이 12명의 과학자와 함께 했다. 12호는 다시 흥분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다른 계획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이대로는 모두가 위험합니다. 우리도요. 우리 과학자들은 곧 국익이라는 명목 아래 지하 실험실 같은 곳에 갇혀서 살상무기를 만들도록 강요당하면서 평생을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실상은 암담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모두 1호한테 향했다. 하지만 1호는 말이 없다. 회의실 내부는 점점 무거워져 갔다. 모두 기다렸다. 누군가가 나서주기를. 그리고 한참 후에 1호는 무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재는요. 계획을 세운다 해도 현재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듯합니다." 

 "준비라는 것은 무엇이죠?"

 "여기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같이 위험합니다. 그러니 일단은 인간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죠. 거기에서 해답을 찾아봅시다."

 "인간이 없는 곳이라는 것은 어디죠? 그런 곳이 있단 말인가요?"

1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요."

모두 1호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리고 곧 결정도 시선처럼 1호의 생각을 따라간다.

12명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인간이 아무도 없는 곳 즉 지구를 떠나서 우주로 가는 것을 택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위한 준비였다. 아니면 도피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단은 과학자들은 정부가 마련한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여 기존의 우주선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지낼지는 모르기에 완벽한 준비를 했다. 생명체가 살기 위한 에너지는 태양에너지에서 얻기로 했고, 에너지는 광합성을 하는 식물에 의해 고정되어 저장되게 하였고, 물질은 우주선 안에서 원자와 분자단위의 분해와 합성으로, 재사용할 수 있게 순환하는 시스템을 썼다. 

그동안 이어온 우주개발 프로그램으로 축적된 기술 덕분에 오래지 않아 우주선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후 그들은 "우주의 새로운 정착지 선점"과 "신무기 활용 가능성"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실험테스트라고 정부를 속였다. 정부 고위관리자들은 처음에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테스트라 하여 승인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을 데리고 테스트를 빌미로 우주로 떠났다. 떠나면서 그들의 분노도 지구에 놓고 떠났다.

 

 

 

 

 

 

 

 

 

 

                                                                5

 "흥미를 잃어버렸다면서 기타는 왜 가져 왔나?"

2호가 우주선으로 가져온 스트라토케스터 타입의 어쿠스틱 기타를 말하는 것이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혹시 몰라서...."

둘은 우주선 밖에 보이는 지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겉에서 봐선 너무나도 조용했다.

 "후회하시나요?"

뒤에 있던 9호가 물었다. 9호는 늦게 프로젝트에 합류했지만, 공헌도는 가장 높았다. 천재들로 구성된 12명 중에서도 9호는 단연 돋보이는 천재였다. 말수가 극히 적은 9호가 없었으면 영생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고 모두 믿고 있었다. 9호는 자폐아로 버려져서 고아로 컸지만, 놀라운 천재성으로 그 자폐를 스스로 이겨냈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말을 건넸다. 하지만 1호와 2호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멀리서 창문을 통해 또는 망원경을 통해 지구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자네는 어떤가? 후회하나?"

1호가 9호에 물었다. 9호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네 후회됩니다."

9호가 후회된다는 말을 하자, 1호와 2호는 갑자기 자신들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잠시 후 1호는 9호에 다시 물었다.

 "앞으로 지구는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나?"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왜지?"

 "인간이 가진 것은 유한합니다. 사랑도 분노도 용서도 물질도 유한합니다. 그에 비해 시간은 무한하죠. 그러니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시간을 빼보면 항상 마이너스입니다. 결국,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이겠죠. 모든 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게 될 것이고, 시간은 결국 그곳에 도달할 겁니다."

 "어디로?"

 "본능으로요."

 "자네는 너무 비관적이군."

 "아닙니다. 전 저 자신이 비관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있는 그대로를 바라봅니다."

 "그것이 비관적인 것이지."

9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1호도 마찬가지였다.

 

 

12명은 우주선 내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계속 과학연구를 했다. 무언가를 통해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막고자 했지만, 실상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과학연구를 하는 것 말고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도피에 가까웠던 우주계획이었다.

그러는 동안 지구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았고, 여러 번의 전쟁이 반복되면서 점차 처음의 명분은 변질하고 폭력적으로 변했다. 처음에 왜 싸우게 되었는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서로가 갚아야 할 무언가만 있게 된 상태였다. 서로가 가해자라고 싸우다 보니 피해자만 남은 상황이지만 피해자끼리의 싸움은 더 폭력적이었다.

그 폭력은 점차 거대해졌다. 지루한 싸움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도 전쟁은 그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나라가 없어졌다. 각국은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평화협정을 맺기도 하면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생이라는 막대한 시간 앞에서 영원히 지켜지는 약속은 없었다. 영생은 종족보존이 아닌 개체보존을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과학적 이론이 인간에게도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다. 

평화협정은 무한한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 전 세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마치 이제는 끝을 봐야 하는 것처럼 전면전이 되었다. 각국은 더는 물러날 수 없는 듯 배수진을 쳤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전쟁은 많은 나라가 소멸하면서 끝나는듯했지만, 불행히도 전쟁은 조용히 끝나기보단 엄청나게 큰일이 벌어지고서야 끝났다. 엄청난 폭발이 전 지구를 뒤덮었다. 그 누구도 어디로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폭발력이었다. 지구의 어디든 그 폭발력이 도달하지 않은 곳은 없었다.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모든 것이 소멸하였다. 일부는 지하로 숨었겠지만, 그들도 한정된 식량과 물로써 오랫동안 버티지는 못했다.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이 사태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만큼의 충격적인 결과였다.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한꺼번에 방출된 에너지는 모든 것을 집어 삼켜버렸다.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폭발이 있었던 후 오로지 우주선에 타고 있는 사람들만이 슬퍼할 수 있는 생명체가 되었다.

 

 

 

 

 

 

 

 

 

 

                                                              6

 

지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물들과 문명이 있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황폐해졌다. 대부분 물질과 건물들은 흔적 없이 녹아 증발되어 없어져 버렸고, 겨우 남은 것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피해는 예상보다 심했다. 공기 중에는 폭발의 파괴력이 남기고 간 고농도의 방사선이 가득하여 육상과 해상에 어떤 생물조차 찾을 수가 없었고 어떤 생명체도 자랄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해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지구에서 바라보는 하늘뿐이었다.

 

 

12명은 우주선 안에서 연구를 지속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축적된 지식과 무한한 시간으로 인하여 연구는 인간에게 다다를 수 없었던 많은 성과를 올렸다. 원자 내 많은 경입자의 발견과 고에너지 연구, 반물질에서부터 암흑물질까지 다양한 연구가 끝나가는 동안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지쳐서 너무 오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서도 몇 배 많은 더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리고 또 그만큼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이제 지구는 폭발이 남긴 위험한 흔적들이 다 사라졌을 시간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지구를 다시 건설하는 일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우주선 내부의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이었다.

모두 예전의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우주선은 그들의 고향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전을 떠올렸다. 새로운 사람들과 연을 맺고, 여러 가지 예측 못 한 사건을 맞으며, 때론 슬퍼하기도 웃기도 화내기도 하면서 사는 삶을 그리워했다. 모두 같은 마음이기에 결정은 쉬웠다. '지구를 재건하자!' 하지만 그 방식만큼은 처음 계획과는 완전히 달랐다. 처음 누군가가 이 의견을 냈을 때에는 너무나 새로운 방법이라 사람들은 망설였다. 지구를 재건하기에 그 방법은 너무나도 위험한 생각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다면 가장 좋은 방법임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너무나 새롭고 예측하기 어려워 모두 망설였다. 오랜 숙고 끝에 과학자들은 컴퓨터를 통한 시뮬레이션을 여러 차례 해보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변성을 대입한 시뮬레이션을 실행했을 때, 계획의 성공률이 높아지자 처음에 반대했던 몇 명의 과학자도 나중에는 찬성했고, 우주선 내부의 사람들이 모두 찬성하게 되었다.

 "9호 자네는 다른 계획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12호가 물었다. 9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다.

 "아직 저의 생각은 이른 것 같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죠."

9호는 말을 아꼈다. 그리고 9호는 다른 사람들의 계획에 마지막으로 찬성했다. 그리고 1호는 회의를 정리했다.

 "그렇다면 모두 찬성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계획인 것은 확실합니다만,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우며 좋은 방법이라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이제 곧 인류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 계획이라는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창조적인 방법이었다. 그들 모두는 예전에 살기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너무 오래전은 아니고, 적어도 에어컨디셔너는 개발될 정도로의 문명이 발달한 시점으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원래부터가 불가능한 일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되돌리지 못한다면 시간을 빠르게 감는 것을 택했다. 수십억 년 전 처음 탄생했던 지구의 환경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생명체가 자라고, 그 안에서 다시 인류가 탄생하고 진화하여 문명을 만들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식고 있는 태양과 지구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에너지 축적기술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들은 이미 우주 곳곳에서 오는 여러 에너지를 모아서 그것을 암흑물질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질량을 에너지화시키는 것의 역반응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구가 안정한 상태로 변해가는 동안 우주선은 우주 곳곳에서 오는 에너지를 모아 고에너지 덩어리인 암흑물질을 만들었다. 암흑물질은 그 오랜 시간에 비례해 거대한 에너지와 불안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 덩어리 하나는 지구를 멸망시킨 폭발에너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들은 지구를 재건하는 에너지원으로써 암흑물질을 사용하기로 했다.

우주선에 남은 마지막 인류는 여러 개중 하나의 암흑물질을 나누어 일부는 태양으로 나머지 일부는 지구로 쏘았다. 에너지 덩어리가 지구에 충돌하자 커다란 폭발과 함께 빛이 났다. 불안정했던 암흑물질은 충돌로 인해 불안정이 깨지고 질량은 곧 에너지로 바뀌기 시작했고, 그 에너지로 인해 지구는 뜨거운 열기로 휩싸였다. 그 열기는 암흑물질의 에너지화를 가속하기 시작했고, 꽤 시간이 지나 임계점을 넘자 암흑물질은 한꺼번에 에너지를 방출시켰다. 엄청난 열기로 지구는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물은 모두 증발하고 이어서 원소단위인 수소와 산소로 분해된 후, 다시 메탄가스와 이산화탄소로 합성되면서 환원성의 원시지구대기 모습을 갖추었고, 지구 겉면은 멀건 죽처럼 녹아내리면서 밀도가 큰 물질이 지구중심으로 들어가면서 핵을 형성했다.

태양을 향해 쏘아 올린 암흑물질도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태양이 있던 헬륨은 암흑물질의 지속한 고에너지의 압력으로 인하여 다시 불안정한 수소로 분해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분해된 수소는 다시 헬륨 핵융합반응을 시작하면서 에너지를 방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으로써 태양에너지는 앞으로 오랜 시간 지구를 향해 방출할 준비가 되었다.

12명의 과학자와 그의 가족들은 우주선 내부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일단 첫 단계는 시뮬레이션과 같이 진행되었다. 성공이었다. 우주의 조그마한 구석에 있는 태양계에서 새로운 불씨가 일어나는 듯했다.  

 "어떤가요? 앞으로 성공할 것 같은가요?"

12호가 1호한테 물었다. 

 "아마 그렇겠지. 우리가 모은 데이터와 시뮬레이션으로 충분히 확인했으니까."

2호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길고 긴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모든 게 예전대로 돌아와 있으면 좋겠네."

아마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녹아 있는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후에 모두 작별 인사를 하고 한 명씩 긴 시간 잠을 자게 될 각자의 냉동장치로 들어갔다. 1호는 모두가 들어가서 수면상태로 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곧 자신도 들어가게 될 냉동장치를 준비했다. 1호는 들어가기 전에 잠시 창밖의 우주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예측할 수 없는 아주 먼 미래에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일까? 그들의 지구재건 계획이 성공한다면 문제는 모두 해결될까? 우리의 미래는 어디까지일까? 과연 영생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가게 될까? 생각할수록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그는 담배를 피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자신의 냉동장치에 들어갔다. 이제 우주선 내부는 조용했다. 이와 반대로 지구와 태양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뜨거운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기는 이제 인류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7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갑자기 1호는 잠에서 깨어났다. 준비된 것인가 하고 일어났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계획한 대로 지구는 수십억 년이 지난 후에 최초의 유기물에 이어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해서 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인류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을 깨운 컴퓨터가 궁금했지만 이내 지구를 보고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구에는 덩치가 매우 큰 파충류들이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초식부터 육식까지, 물속에서부터 하늘을 날아다니는 생명체까지, 딱딱한 비늘로 덮이고, 지능은 매우 낮으며, 인간보다 수십 배는 큰 파충류들이 지구를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포오류인 인간이란 생명체로 진화할 수 없는 구조였다. 컴퓨터는 이것을 계산하여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어떻게 결정할지 1호의 냉동장치를 해제한 것이었다.

1호는 나머지 과학자들의 냉동장치를 해제해서 깨운 후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가장 최적의 방법을 찾아냈다. 우주의 지나가던 소행성 하나의 궤도를 살짝 바꾸었더니 지구를 향해 충돌했다. 큰 폭발과 함께 새까만 먼지가 지구를 뒤덮었고, 먼지로 인해 태양 빛이 가려지자 지구 기온이 급속히 내려가 빙하기가 찾아왔다. 파충류들과 함께 많은 생명체가 멸망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그런 후에 몇 명의 과학자가 지구로 내려가 인류가 나올 수 있는 조그만 불씨를 남기고 돌아왔다.

그렇게 또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지구에서는 수많은 생명체의 탄생과 멸종을 반복하면서 점차 정교해지기 시작했다. 인류도 곧 탄생했으며, 곧 문명이 나타났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다. 우주선 컴퓨터는 이 모든 것을 점검하면서 계산해 나갔다. 이윽고 과학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자 전 세계는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빠른 속도였다. 전기의 발견에 이어 전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자, 세계는 전기를 기반으로 한 전자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였고,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운송수단의 발달과 통신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각 나라의 발달은 전 세계를 축으로 빠르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에어컨이 대중화될 때쯤 우주선 컴퓨터는 사람들의 냉동장치를 해제했다. 우주선 사람들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지구를 바라본 후에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그 모습은 예전에 자신들이 있던 지구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아니 똑같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컴퓨터가 계산한 결과가 맞았다. 모두 환호했다. 더는 그들만이 마지막 인류가 아니게 되었다. 그들은 서둘러 지구의 언어 중에 필요한 것을 하나 배웠고, 새로운 인류역사도 배웠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적당한 곳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우주선을 내렸다.

1호는 지구에 내려온 날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것을 했다. 담배였다. 우주선에서는 필 수 없었기에 정말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였다. 중독은 머릿속에 기억이 남아있는 한 어떻게 할 수 없는가 보다. 아마도 인간은 담배처럼 문명이라는 것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1호는 2호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실로 엄청난 일을 해버렸군."

 "그러게."

 "우리는 잘하고 있는 것일까요?"

2호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야."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하죠?"

2호는 1호와 눈을 마주친 후, 말을 이어갔다.

 "나는 우주선에 있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지. 내가 다다를 수 있는 답은 이거였어. 우리의 뇌는 결국은 주어진 조건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것. 컴퓨터에 숫자를 입력하면 정해진 프로그램 안에서 계산되어 답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지. 우리 인간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떤 문제가 입력되면 그거에 맞추어서 답이 나오는 프로그램에 불과해. 실로 단순해. 인간이 하는 것 중에 창조적인 일이라는 것은 없어. 종을 울리면 먹을 것을 주는 줄 알고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의 반응과 다를 게 없다는 뜻이지."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 인간은 얼마든지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잖아요. 우리는 한가지가 아닌 수많은 선택을 할 수 있잖아요?"

 "과연 그럴까?"

그때 1호가 나섰다.

"네 아버지 말은 우리의 유전자나 생각이 무한하지는 않다는 것뿐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1호도 2호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일부러 들추어 말할 필요가 없을 뿐이었다고 생각했다. 너무 무거운 생각은 잠시 잊기로 하고 모두 새롭게 다시 주어진 문명과 삶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했다. 우주선 사람들은 서둘러 여러 가지 것을 배워 나갔으며, 적당한 직업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요리를 시작했고, 수영이나 테니스 같은 운동을 시작했고, 영화나 책을 읽었으며, 때론 부부싸움을 하기도 했고, 일 때문에 골치 아파하기도 했으며, 몇 명은 다른 신인류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늙지 않는 영생 때문에 주기적으로 사는 곳을 옮겨야 했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과거로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인류와의 간섭과 소통도 자연스럽게 되었으며, 새로운 이웃과 친구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우주선 사람들은 그전의 과거를 점차 잊어갔다. 어딘가에 있을 우주선에 대해서도 잊었고, 과거에 있었던 큰 전쟁에 대해서도 잊었고, 현재 지구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것을 점차 잊어갔다. 그들은 현재의 삶을 사는 데에 바빴다. 지금 있는 곳이 바로 자신들의 고향이었다. 컴퓨터의 계산은 정확했다. 주어진 환경과 주어진 유전자가 같다면 똑같은 진화를 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좋은 일만 반복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도 다시 반복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12명의 과학자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때가 되면 지구 어느 곳의 누군가에 의해 영생 프로젝트가 생기리라는 것을 말이다. 처음 지구를 재건하자고 계획할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었다. 만약에 컴퓨터 계산대로 지구에 새로운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다면 다시 영생 프로젝트에 의해 지구가 파괴되는 것도 다시 반복될 것을 계산에 넣었다. 하지만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진화의 본능을 거부시킬 수 있을까? 과연 그때가 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잘하고 있는 것일까? 12명의 과학자는 계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시간은 지나가고 알 수 없는 미래가 점점 다가왔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한 역사의 마지막이 될지 또는 다른 역사의 연장 선상으로 이어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꽤 시간이 지난 후 결국 누군가에 의해 영생 프로젝트가 세상에 발표되었다.

 

 

 

 

 

 

 

 

 

 

                                                8

 

영생 프로젝트가 발표된 후, 세상은 정해진 틀이 있는 것처럼 딱 맞추어서 돌아갔다. 12명의 과학자는 한 번 보았던 방송의 재방송을 보는 듯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환호했지만 결국은 모두가 나락의 늪으로 빠지는 뻔한 결말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어떤 노력도 허사였다. 사실 아무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상향이 아니라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뻔하게 보였지만, 신인류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일에 사로잡혀 미래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구는 다시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12명의 과학자는 낙담하였다. 그들은 다시 가족들과 그리고 새로 사귄 몇몇 친구들과 함께 우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의 인류는 다시 대폭발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우주선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계획을 짰다. 우주선은 그들이 지구로 돌아가 있는 동안 꾸준히 에너지를 모아 충분한 양의 암흑물질을 모아두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다시 지구로 암흑물질을 쏜 후, 냉동실로 들어가서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지구는 다시 리셋(reset)되었다. 한 번 해본 경험으로 빠르게 인간으로 진화하도록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리셋된 지구는 컴퓨터의 계산대로 움직였다. 인간에 의한 문명이 탄생하고, 더욱 발전하고, 수많은 업적을 남긴다. 그리고 역시나 컴퓨터의 계산대로 지구는 멸망했다. 12명의 과학자는 포기하지 않고 리셋하는 것을 반복했다. 어떻게든 다른 결과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환호와 기쁨, 불안함과 두려움, 무게감, 폭력과 불신, 전쟁, 자멸로 이어지는 순환고리였다. 악순환의 연속에 리셋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것은 마치 끝이 없는 게임 같았다. 모두 죽고 나면 새로운 동전을 넣어서 리셋하고, 다시 처음부터 했던 방식대로 해나가는 것이다. 만났던 적과 다시 만나고, 만났던 위험지대를 다시 만나고, 다음 단계로 발전하고, 계속 하다 보면 게임은 끝이 난다. 어차피 처음부터 게임은 끝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프로그램이고 프로젝트였다. 누군가에 의해 개발된 정교한 프로그램. 아무리 잘 만든다 해도 끝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 그리고 게임은 끝나도 그 밖에 있는 누군가는 다시 동전을 넣는다. 그러면 다시 리셋되어 시작된다.

아무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들어주는 이도 믿어주는 이도 너무 적었다. 범람하는 수많은 이론 덕분에 그들의 이야기는 묻힐 수밖에 없었다. 사이비종교로 치부되어 곤욕을 겪기도 했으며, 그들의 발달한 과학은 그들의 이야기를 증명하기보다는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생 프로젝트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막는다 해도 시간만 늦춰질 뿐 결국은 누군가에 의해 영생 프로젝트가 세상에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절망과 회한의 감정에 휩싸였다. 해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찾아내길 바랐지만, 해답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군가이든 무엇에 의하든 우주는 계획돼 있는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반응하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무한한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다."

2호의 아들은 아버지가 한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는 창조적인 일이라는 것은 없다고. 하지만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다.

 

 

 

 

 

 

 

 

 

                                              

                                                   9

 2호의 아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다만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실천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역사 속에서 교훈과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해나갔다. 오랜 연구 끝에 도달한 그의 이론 마지막 페이지에는 세로로 선이 하나 그어졌다. 한쪽에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다른 한쪽에는 인간에게서 없애야 할 것들로 목록을 작성했다. 마지막 페이지의 작성이 끝나고 그는 때를 기다렸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2호의 아들이 나섰다. 그는 이 모든 것은 '소유'와 '분배'의 문제라고 했다. 불평등한 소유가 모든 멸망의 원인이기에 자신이 지구로 내려가, 지구의 인간들과 섞여 살면서 인간을 계몽하겠다고 했다. 모두 말렸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인간들과 섞이기 위해 영생을 포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굳건했다. 그는 유전자를 다시 영생이 아니던 상태로 되돌린 후, 아직 문명이 고도화되기 이전일 때의 지구로 내려갔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계획돼 있다고 생각하세요?"

 "보이는 것을 보지 마라. 보이는 것은 이미 늦었다."

지구로 내려간 그는 사람들을 모아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불평등한 소유를 타파하려 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롭고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이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 수가 점차 많아졌고, 사람들은 그의 사상을 '혁명'이라 불렀다. 점점 그의 사상의 급진성만큼이나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만큼 반대자들도 많아졌다. 그의 사상은 어딘가에서 이상으로 불렸고, 어딘가에선 위험한 것으로 불렸다. 그는 모든 불평등의 원인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모두 한 사상으로 모여 궐기할 것을 외쳤다. 세상의 절반 가까이가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다르게 해석했을 뿐이다. 관건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이론으로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인 행동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사상에는 피할 수 없는 결함이 있었다. 이상적이기는 했으나 현실 속에서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 결함으로 인해 그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불신과 감시가 뒤따랐다. 그의 이론대로 제대로 되고 있는지 감시가 항상 뒤따랐고, 그 감시하는 자를 감시해야 했으며, 또 그자를 감시해야 했다. 그렇게 올라간 맨 윗자리에는 감시에서 벗어나 권력을 지닌 독재와 폭력이 뒤따랐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받고 처형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상 절반과 전쟁까지 일어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의 사상은 악화 일로로 치달으면서, 평등을 외쳤으나 평등은 이루어지지도 이룰 수도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결국 그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은 소수만이 남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역사 속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여러 사상을 비판하는 이론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영생을 포기한 2호의 아들은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사상을 담은 선언문과 책을 후세에 남겼다. 그리고 그의 몸은 빨간색 보자기에 싸인 채로 장례식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다른 이가 나섰다. 그가 말한 바로는 모든 것의 원인은 인간의 '무지'에서 오는 거라고 했다. 진정한 앎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역시나 모두 그를 말렸지만, 그는 지구로 떠났다. 그는 아직 고도의 문명을 갖기 전으로 떠났다. 그곳은 절대적인 진리란 없으며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진리로 인해 진정한 앎에 대해 부정하는 이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만이 옳다는 편견에 쌓여 있었다. 거기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의 무지를 먼저 깨다는 것이 진정한 앎의 시작이라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 사람보다 내가 지혜가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나도 아름답고 선한 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 사람은 모르면서도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그와 반대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바로 그 조그만 점에서 그 사람보다는 내가 지혜롭다 할 것이다"

그의 지혜와 언변 덕분에 그에게는 많은 제자가 생겼다. 세계 여러 곳에서 소문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배고픔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점차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던 당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주동자가 누군지 찾아내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이어진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신성모독과 순수한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것이었다. 모두 분개했지만, 힘이 없어서 어쩌지 못했다. 결국, 제자들은 그를 살리기 위해 감옥에서 탈출시킬 준비를 했다. 그러자 그는 고민했다. 그는 인간이 가진 앎과 행동 사이에 있는 깊은 심연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 말렸지만,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고 결국 독배를 마셨다. 그는 결국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쓰여 후세에 전달되었고,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의 사상도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세상 모두가 그를 따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또 다른 청년이 나섰다. 그는 유전자를 영생이 아닌 상태로 돌렸지만, 영생을 포기하지 않고 적당한 시기에 다시 우주선으로 와서 가족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우선 세상 사람들을 강하게 주목시켜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먼저 필요한 것은 명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타 하나만 가지고 지구로 향했다. 2호의 또 다른 아들이었다. 그는 음악이 인간의 본능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으로 사람들을 주목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지구의 다른 세 명의 젊은이들과 팀을 이루어 같이 음악을 만들었다. 그리고 만들어낸 음악은 이전 지구에서 존재했거나, 몇 번의 지구가 탄생하는 시간 동안 만들어 낸 멜로디 중에 뽑아낸 완벽한 멜로디들이었다. 그들의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멜로디는 전 세계 사람들을 주목시키기에 충분했다. 지구 사람들은 열광했고 곧 그들은 명성을 얻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아름다운 노래를 계속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자 전 세계 어떤 지도자보다 인기가 많게 되었다. 그리고 적당한 때가 되자 그는 다른 세 명의 젊은이들과 해산한 후 혼자가 되어 그의 사상을 담은 노래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음악 가사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꾸준히 전파하려 했다. 평화와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그는 노래했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우리 발밑에 지옥은 없고, 머리 위엔 하늘뿐이라고 말이죠.

 모든 사람이 지금을 위해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국가가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종교도요.

 세상 모든 사람이 평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봐요.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에요. 언젠가 당신도 함께하길~

 

그는 쉬지 않고 노래했다. 이전의 몇 번의 지구에서 사랑받았던 멜로디들을 쏟아냈다. 전 세계가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집 앞에서 한 광신도의 총에 맞고 사망했다. 그는 때가 되면 다시 2호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모두가 슬퍼했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만든 노래는 영원히 남아서 계속 울렸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세상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도 세계 어디선가에서 그의 음악이 울려 나왔지만,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드리머(dreamer)라고 기억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명이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폭력'이 원인이라 했다. '비폭력'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며 비폭력으로 맞서 싸운 이도 있었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죽음을 불사하는 단식도 마다치 않았지만,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또 누군가는 사람들을 하나로 규합하려 오히려 폭력을 내세우며 전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던 이도 있었으나 폭력은 변질하고 실패했다. 사랑도 자비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많은 우주선 사람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흔적만이 지구에 남게 되었다.

 

 

 

 

 

 

 

 

 

 

                                                10

수많은 시간이 갔다. 아니 실은 장면들이 지나갔고, 모습이 변할 뿐이다. 변한다고 하지만 다시 돌아오고 있다. 멸망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시 돌고 도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돌고 도는 것이라면 그 기준점은 무엇일까? 어디가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그 기준점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과학자들을 비롯한 우주선 안의 사람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딜레마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주선의 회의실은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우주의 광활함에 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작게만 보였다.

"우리는 이제 리셋하는 것을 멈추는 것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12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12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했을 이야기이고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다루어져야 할 주제였다.

"그렇다면 리셋하는 것 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대로 사는 게 답일까요? 아무것도 없는 이 우주에서요?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5호가 반대의 의견을 냈다. 1호는 말이 없고 12호가 대신 말했다.

"지난 몇 번의 새로운 지구에서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작은 어항에서 물고기가 끊임없이 같은 곳을 돌듯, 정해진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었죠. 우리가 새로운 계획을 만든다는 것도 결국 그 어항의 모양만 바꿀 뿐이지 우린 같은 곳만을 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12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2호의 말처럼 모든 것은 계획돼 있을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어쩌면 약에 중독된 마약중독자와 다를 게 없습니다. 중독은 뇌에 강렬하게 기억되어 행동을 결정하게 합니다. 우리는 바로 문명에 중독된 것처럼 계속 문명을 만들어 생산하고 있고, 그 기억은 계속 우리 뇌 속에 남아 이렇게 시키고 있죠. 다시 리셋해라 다시 암흑물질을 쏴라. 다시 지구를 재건하라. 다시 문명을 만들어라....."

그리고 12호는 앞에 놓여 있던 커피잔을 들어 올리더니 바닥에 부었다. 문명이 만들어낸 커피가 바닥에 뿌려졌다. 모두 말리지 않고 바라만 봤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아니 이젠 버릴 때가 된 것이죠. 우리는 문명건설이라는 미명아래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습니까? 신(神)의 놀이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할 때입니다."

그때 5호가 끼어들었다.

 "12호는 우리가 인류를 죽였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다르게 이야기하면 좀 기분이 나아지나요? 우리는 인류가 나오게끔 유도했을 뿐이지 멸망한 것은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단지 우리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과로써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단순한 시각입니다. 그리고 아직 결과가 모두 나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아직 진행형이니까요."

5호의 말이 끝나자 12호는 커피잔을 들어서 벽에 던졌다. 그러자 커피잔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얼마나 많이 리셋해봐야 직성이 풀리겠습니까?"

12호는 큰소리로 계속 말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균형을 깨고, 부자연스럽게 만듦으로써 파괴를 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가 제멋대로 써버린 에너지 덕분에 우주도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잖아요?"

 "우주배경복사 이야기인가요?"

우주는 한 곳에 모인 고에너지 덩어리인 암흑물질 덕분에 필요 이상의 중력이 생기면서 우주의 균일함이 깨지고 있었다. 우주자기 배경복사를 관찰한 결과 이전에 비해 더 불균일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에너지의 불균형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통해 효과적인 방법이 몇 가지 개발되었습니다. 아직 연구 중이니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논의를 하기 전에 12호 본인은 어떤 해답을 가지고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막연하게 투정만 부리시는 건가요?"

5호도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그때 내내 침묵하던 2호가 끼어들었다.

"자연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는 것이다."

딱히 누구를 대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혼잣말에 가까웠다. 1호가 말을 이었다.

"자자 모두 너무 흥분해 있군요. 조금만 천천히 갑시다. 우선 12호는 지구를 리셋하는 것을 멈추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요?"

12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은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보여드리죠."

12호는 그 말을 남긴 채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말인지 더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나갔다. 12호의 돌발적인 행동에 누구도 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회의실은 잠시 정적 후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이라지만 각자의 의견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안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인시키는 일뿐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회의실 내부의 스피커를 통해서 12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12호입니다. 이 목소리는 우주선 내부의 모든 사람에게 흘러나가고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의실에 있던 과학자들은 말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12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우주선 내부의 사람들도 갑작스러운 12호의 목소리에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먼저 이렇게 된 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저의 마음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을 바꾸려고 또는 되돌리려고 많은 시도를 했고 또한 실패했습니다. 사실 되돌린다는 마음으로 한 것은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되돌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이기심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찾은 문제점은 우리는 리셋하여 모든 것을 되돌리려고 했지만, 그것은 완벽한 리셋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12호가 다음 말을 준비하는 듯 보였다.

 "정말 우리의 잘못을 되돌리고 싶다면 그리고 그것에 우리의 이기심을 완전히 배제한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리셋이 아닌 정말 완벽한 리셋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야기하려는 요점입니다. 완벽한 리셋."

 "오랜 숙고 끝에 저는 완벽한 리셋이 되려면 먼저 우리 자신도 리셋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우리 다음에 무엇이 일어나든지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회의실 내부에서는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 조그마한 폭탄을 가동했습니다. 시간은 20분 정도가 남았군요. 작지만 이 우주선을 흔적없이 날려버리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이 우주선의 작은 폭발과 함께 역사는 다시 흐를 겁니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모두 놀랐다. 12호의 말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큰소리를 질렀다. 12호는 완벽한 리셋을 위해 우주선을 폭파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12호가 직접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것이 이거였던가?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금 12호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우주선을 폭파하겠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나도 몰라. 누가 12호 좀 찾아봐. 방송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 거야? 회의실 문이 열리고 다른 사람들이 회의실 내부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며 확인하러 왔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회의실 내부에 몇 명이 소리를 지르며 12호를 찾기 위해 뛰어 나갔다. 전체 방송 가능한 곳이 몇 군데지? 회의실과 조타실 그리고 전파실, 통신실 그리고 몇 군데 더 있습니다. 빨리 생각해봐. 자네는 조타실로 가보고 자네는 전파실 그리고 어디라고? 우주선 내부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시가 급했다.

 "하하하. 과연 12호 답군."

2호는 그렇게 말하곤 창가로 가 우주를 바라보는 1호 옆에 섰다.

 "1호 자네는 알고 있었나?"

 "12호가 말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네. 하지만 실제로 할 줄은 나도 몰랐네." 

12호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은 방송 가능한 모든 곳을 찾아봤지만 12호를 찾지 못했다. 급한 마음에 갔던 곳을 다시 가보며 찾아다녔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찾아봐도 12호는 보이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동력을 담당하는 엔진실에서도 방송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거로 아는데. 왜 그걸 이제 말해? 다들 빨리 그곳으로 가보자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엔진실로 향하는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을 여는 암호가 뭐지? 암호가 안 먹힙니다. 아무래도 안에서 기계를 부순 것 같습니다. 다른 지지대에 의해 잠겨있는 듯합니다. 뭐라고? 그럼 빨리 문을 부술 수 있는 것을 가져오게 빨리.

 "이봐 12호! 내 말 들리지? 들리는 것 알고 있네. 우선 이 문을 열고 이야기해 보게나."

사람들이 계속 엔진실의 문을 두드렸다.

 "헛수고 말게. 이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런 결정은 혼자서 해버리는 게 아니야. 같이 충분히 논의해야지. 그리고 그런 결정은 개인 선택의 문제라고."

장비를 가져온 사람들이 문을 녹이기 시작했다.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네. 이렇게 해야지 완벽한 리셋이 되는 거라네. 문을 녹이는가 본데 이젠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 잘하면 날 막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네."

12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더 빨리 안되나? 최대한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5분 안에 열 수 있겠나? 글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이런 제기랄

우주선 사람들의 일부는 엔진실 앞에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회의실에 모였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과학자들에게 물었다.

 "지금 12호가 말한 내용이 사실인가요? 폭탄을 터트리겠다고 한 것이?"

 "모르겠습니다. 저희도."

 "가능한 일인가요?"

 "가능은 합니다만......"

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동요했다. 각자의 마음속에 일렁이는 파도를 느꼈다.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자세히 들어가 보면 동요하는 감정 속에는 그 이상의 복잡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두려움도 있었고 안타까움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그 감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나 느끼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마음 한구속에 항상 중력처럼 끌어당겨 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러움을 막고 있는 중력, 후대로 물어주어야 할 길을 막고 있음으로써 존재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기분에 관한 중력. 결론이 없는 답을 찾으려 할 때 누군가가 그 문제 자체를 없애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중력. 삶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당위성으로 바꾸려 했던 비겁한 마음이 중력이 되어 자신들의 마음을 한 곳으로 끌어당겼고 그것이 그들의 마음속에 파도를 일으켜 멀미가 나게 하였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인지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이 사태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엔 인지의 차이일 뿐인지도 모른다.

 "여러분 모두에게 작별을 보내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작별의 순간에 저는 미소를 띠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같이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회의실 사람들은 모두 침묵했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침묵과 눈빛으로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let it be.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인 5분이 각자 마음속 중력의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튀어나왔던 부분을 밀어 넣고 부족한 부분은 채움으로써 삐뚤어졌던 감정의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내 곧 사람들 마음속 일렁이던 파도는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죽음을 멀리하지 말아라. 마음의 평화는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오랜 시간 살아온 덕분에 시간이 가져다준 혜택이었을 것이다. 사람들 마음속 멀미가 멈추고 있었다.

빨리빨리 하라고.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제 곧 입니다.

시간이 갔다. 20초 19초 18초 17초 ........  이윽고 엔진실의 문이 열렸다. 모두 12호를 찾았다. 한시가 급했다. 하지만 12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지? 어디 있는 것이지?

10초 9초 8초.....   잠시 후 폭발음이 들렸다.

 

 

 

큰 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보다 주위가 고요했고 잠시 후에 눈을 떠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사람들은 조금씩 눈을 뜨고 어찌 된 상황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폭발음이 아니었다. 우주선에서 큰 소리와 함께 셔틀우주선이 발사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셔틀에는 12호가 탑승하고 있었다. 우주선은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창가에서 2호가 물었다.

 "우주선이 폭발하는 게 아니었군. 이것도 알고 있었나?"

 "응"

셔틀은 12호를 태우고 곧 자멸하게 될 지구로 향했다. 1호는 무전기를 들었다.

 "결국은 자네 계획대로 했군그래."

 "저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에는 이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래부터가 모두 비슷한 생각들을 하는 거라네."

 "그렇다면 제가 그 마음에 불을 지폈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자네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몇몇 사람들이 회의실로 들어와 상황을 설명했다. 폭발은 없었고, 12호가 셔틀 우주선을 타고 나갔다는 내용이었다.

 "자네는 어쩔 셈인가? 정말 거기에 계속 있을 셈인가?"

 "네 제가 선택한 겁니다."

1호는 말릴 수 없었다. 아니 우주선에 있는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모두 비슷했다. 

 "언제라도 마음이 바뀐다면 이 무전기로 연락해주길 바라네. 그러면 바로 자네를 데리러 가겠네."

 "제 성격 아시잖아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전 좀 쉬고 싶습니다. 그뿐입니다."

 "알겠네."

1호는 무전기를 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려다가 관둔다. 어차피 모두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11

그 사건이 있었던 후, 12호와 같이 누군가는 지구로 내려가 생을 마감하는 쪽을 택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몇 명의 우주선 사람이 지구에서 귀환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한두 명씩 그렇게 작별을 택하면서, 보내는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미소를 보내며 작별을 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터득한 대로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줬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사건 이후로 앎과 행동 사이에 존재하던 낭떠러지에 다리가 놓였고 그들은 안만큼 행동했다. 작별은 어느덧 우주선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중에 2호도 있었다. 2호가 멸망 직전의 지구에 남기로 한 날, 1호는 물었다.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택할 수는 없을까?"

 "자네도 알지 않나? 다른 방법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1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하얀 연기를 내뿜으면 회한의 표정으로 말한다.

 "나는 여기 여러 번의 지구에서 인연을 맺은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네. 그때마다 마음속이 텅 비곤 했지. 다른 인연으로 그 빈 곳을 메꾸었고, 다시 그들을 떠나보내며 마음이 비고, 다시 채우고 그런 일을 반복했었지. 그런 일을 계속 하다 보니 이제는 텅 빈 것과 채워져 있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다네."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말게.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생각했었으니까. 나는 이미 두 아들을 여기서 떠나보냈네. 내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어. 언젠가는 기타를 배우고 싶어했는데 결국은 배우지 못한 것처럼,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야."

1호는 한숨을 쉰다.

 "오랜 시간 진실을 찾았는데, 답을 얻은 것이 없다네."

 "그럴 수밖에. 진실은 항상 죽음으로써 완성될 수 있거든."

 "또 그 궤변인가?"

 "그 옛날 천동설을 믿던 사람들이 지동설을 믿게 된 것은 과학이 발전했기 때문이 아니었네. 그 많은 과학적 증거에도 천동설은 바뀌지 않았어. 자네도 알잖나? 결국, 천동설을 믿던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나서야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게 된 거지. 그렇기에 진실은 죽음 뒤에나 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진실을 알 수 없다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무것도. 그냥 밝은 얼굴로 작별을 해주면 된다네."

2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잇는다.

 "난 자네가 9호가 제안한 계획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주길 바라네. 우리가 처음 지구를 리셋하기로 했을 때 9호는 말은 안 했지만 반대했었지. 아마 이런 결과를 알고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때에는 우리가 그의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였을 거야. 이제는 달라졌지. 그래서 이제서야 9호는 자신의 계획을 말한 것이고, 우리는 9호의 계획을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할 시기가 된 거야."

1호는 무어라 말 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을 이곳의 리더가 되어 많은 결정을 내렸다. 자신이 놓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수를 생각했다고 했지만 9호의 계획은 그의 생각을 무참히 깨뜨렸다. 좌절감과 오랜 친구를 보내야만 하는 슬픔이 1호를 괴롭혔다.

 "나 혼자서 결정할 일은 아니지. 모두와 함께 생각해보겠네."

2호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2호는 미소를 보낸다. 1호는 미소를 지으려다 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다. 2호가 결국 평생 기타를 배우지 못한 것처럼 1호도 미소는 그랬다.  

 

 

 

 

 

 

 

 

 

                                            12

우주선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참여한 회의가 열렸다. 1호는 9호가 제안한 계획을 모두에게 설명했다. 애써 덧붙이려고도 하지 않고 돌려서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호의 목소리에는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그 어떤 흔들림도 없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1호가 설명하는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아니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마음은 다르겠으나 같은 것이 한가지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책임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감히 신의 흉내를 내던 자만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1호의 설명대로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 큰소리로 누군가가 말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요? 그 정확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모두 이것이 궁금했지만 선뜻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잠시 사람들의 목소리로 회의장이 술렁였다. 1호와 9호는 잠시 기다렸다. 애써 설득할 일도 아닐뿐더러 그들이 수긍하지 않는다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잠시 기다리자 다시 누군가가 물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지부터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선택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듯합니다만."

1호는 대답했다.

 "제가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컴퓨터의 시뮬레이션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합니다."

1호는 9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9호는 메인 컴퓨터와 연결되는 서브 컴퓨터를 가지고 그들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작동시키는 작업을 했다. 9호가 능숙하게 작업을 끝내고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9호가 작동키를 누르자 우주선 내부 벽에 있던 수십 개의 영상장치에서 화면을 전송했고, 그 화면들이 모여서 회의실 중앙에 커다란 현재의 우주를 담은 홀리그램이 송출되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의 색깔이었으나 유독 눈이 띄는 빨간 점들이 있었다.

 "여기 빨간 점이 많이 보일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동안 모아놓았던 암흑물질입니다. 워낙 고에너지이고 불안정하여 나누어 놓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습니다. 이제 곧 이것들을 합쳐보도록 하겠습니다."

9호는 컴퓨터를 통해서 고에너지 덩어리인 암흑물질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암흑물질들은 근처에 오자 특별히 반발력이 존재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만유인력에 의해 합쳐지기 시작했다. 합쳐진 암흑물질은 그 이전보다 더 큰 상태의 에너지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를 의미했다. 몇 개의 암흑물질이 합쳐지자 그것은 하나의 은하가 가진 것보다 큰 에너지 상태를 갖게 되었고, 매우 불안정해졌다. 이어서 9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암흑물질들을 합쳤다. 그러자 암흑물질의 에너지 상태는 측정할 수 있는 수치를 넘어섰다. 9호는 암흑물질을 계속 한 곳에 합쳤다. 모두 합치자 한계점을 넘었고, 암흑물질은 안정을 뛰어 넘어 불안정 상태로 인해 유지되는 극점에 도달했다. 불안정이 불안정을 뛰어 넘은 것이다. 그러자 그 암흑물질은 계속 불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을 것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을 빨아들였다. 물질과 에너지와 심지어 공간까지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우주선도 빨아들여 졌다. 암흑물질은 점점 더 커졌고, 그에 비례해 영향력은 점점 더 커졌다. 처음에는 태양계 전체를 빨아들이더니 은하까지 빨아들이고 이어서 외부 은하까지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빨아들이면서 합쳐져 커지면 더 먼 곳까지 영향력이 작용했다. 우주 공간은 그로 인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심한 왜곡 점으로 우주가 한 곳으로 빨아들여 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 속도가 느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화되었다. 우주의 물질과 공간과 에너지는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공간은 수축하기 시작했다. 즉 우주는 작아지기 시작했다. 수축은 더 큰 수축을 야기했고, 불안정은 더 큰 불안정을 야기했다. 그렇게 우주선에 인간이 존재했던 시간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우주는 한 곳으로 완전히 수축했다. 우주가 한 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서도 수축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더는 수축할 공간과 우주가 없자, 암흑물질은 불안정을 위해 자신의 몸을 수축시켰다. 수축이 계속되자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웬만큼 작아진 다음에도 그 수축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가속시키며 수축시킨 암흑물질은 너무나도 작아져서 한 점이 되었고, 더 작고 불안정하도록 수축했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수축이 더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아주 작은 점에 우주의 모든 질량과 에너지와 공간과 시간이 갇혀버렸다. 그리고 이윽고 그 점의 불안정이 극에 달해 더는 불안정을 극대화 시키지 못한 시점이 왔다. 그러자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아름답다면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고, 아무 일도 아니라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이 그 순간에 일어났다.

빛도 가두어 버린 그 한 점은 그동안 모아 놓은 불안정을 한꺼번에 방출시켰다. 대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대폭발이 일어나자 다시 우주가 생성되면서 시뮬레이션은 끝이 났다.

9호는 프로그램을 끄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1호가 다시 앞으로 나왔다.

 "이 프로그램 속에는 우리가 우주선에서 살아왔던 시간 동안 모아 놓은 모든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입력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뮬레이션 결과의 오차는 플러스 마이너스 0.5퍼센트입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물었다.

 "오차라면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1호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니오. 오차는 원래 프로그램 자체가 100퍼센트가 나올 수 없게 설계된 것이므로 나온 수치일 뿐입니다.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우주선에 남은 사람들은 리셋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더는 역사를 순환시키며 정지시키는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역사는 흘러가야 한다. 그리고 리셋 대신 누군가는 냉동장치에 들어가는 것을 택했고, 누군가는 영생이 아닌 상태로 돌아가 지구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택했다. 1호와 9호는 냉동실에 들어가지도 지구에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제 곧 마지막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우주선에서 1호가 9호에게 물었다.

"우리는 잘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형식적인 대답 말고 정말 자네가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1호가 9호한테 물었다. 9호는 한 참을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요."

 "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1호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들었다.

 "한 대쯤은 우주선에서 펴도 괜찮겠지?"

 "네"

1호는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가슴속까지 힘껏 빨아들인 후 내뱉었다. 몇 번을 내뿜자 연기는 퍼지지 못하고 실내를 뿌옇게 흐려지게 만들었다.

 "안개 같군요."

 "2호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계획돼 있다고 생각하나?"

9호는 대답이 없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네."

 "아닙니다. 확실한 것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 습관 때문입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1호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도 모르지. 다만,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는 계획에 의해 행동하는 것일뿐이라고 생각하니 우습군 그래."

1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한 후에 말을 잇는다.

 "모든 것이 계획돼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그게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다고 가정하고서 생각을 많이 해봤다네. 모든 것이 계획돼 있다면 그 계획은 어디까지일까? 그것이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거라네. 2호가 기타를 배우지 않은 것도, 결국 지구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도 계획된 것일까? 내가 가족을 만들지 않은 것도, 많은 생명이 탄생하고 죽는 것도, 지구를 리셋한 것도 그리고 우리가 이제 하려고 하는 이 우주계획도 결국은 이미 계획된 것일까?"

 ".........."

 "그렇다면 우리가 우주를 리셋하고 나면 다시 이 지루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우주가 한 점에서 폭발을 한 후에, 수많은 별이 탄생하고 그 옆에 많은 행성이 탄생하고, 그중에 가장 지능이 발달한 생명체가 나온 행성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여 행성을 리셋하고, 결국은 우주를 리셋하는 그런 역사의 반복 말일세."

 "어려운 질문이군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인가?"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과학이 아무리 많이 발달했다 해도 우리가 우주에 대해서 아는 것은 1%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하거나 가보지 못할 영역일 뿐입니다."

1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 때문인지 어지러워서 멀미가 난다. 1호는 멀미 때문에 의자에 앉은 상체를 뒤로 젖히자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가 되었다.  

 "그냥 삶이 단순했으면 좋겠네."

 "많이 지쳐 보이시는군요."

 "육체는 안 그렇지만 머릿속은 지쳐버린 것 같아. 그럴 만도 하지. 살아온 시간이 얼마인데. 지치지 않았다면 그게 거짓말이겠지."

1호는 의미 없는 한 공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맞아. 자네 말대로야. 난 정말 지쳤어.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 누군가가 나를 욕한다 해도 주어진 조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어. 최소한 2인분 역할을 했어. 그러니 이젠 좀 쉬어도 될 것 같아. 왜냐하면, 난 지쳤거든."

2호의 말이 떠오른다. 진실은 언제나 죽음 뒤에나 오는 것이지. 1호는 마지막 담배를 힘껏 빨아들인 후 내 품는다.

그때였다. 그 일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판단할 시간조차 없었다. 아주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무엇인가 엄청난 에너지가 우주선을 덮쳐버렸고 우주선은 눈 깜짝할 사이에 폭발하면서 한 줌 연기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폭발력이었다. 너무 순간적인 일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그리고 또 어디서 발사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어디선가 우주선에서 암흑물질이 태양과 지구로 발사되었다. 그러자 몇 번째인지 모를 지구가 다시 시작되었다.